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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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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토    
글쓴이 : 이영희    17-04-08 11:05    조회 : 5,540


                                       구토

                                                                         이 영 희

 

    늦은 밤, 베란다 창을 통해 젊은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가로수 밑에 쭈그리고 앉아 구토의 거북함을 안고 울고 있다. 실연의 아픔일까. 아니면 삶의 고달픔일까. 나는 자리에 누워서도 그녀의 모습이 떠나지 않는다.

   여자와 함께 잔을 부딪치며 농담을 주고받았던 사람은 어디에 두고 저렇게 혼자 울고 있을까. 어떤 서글픔을 이기지 못해서 저 여인은 기어이 삶의 찌꺼기마저 확인할 수밖에 없을까.

   스무 살이 되고 얼마 후 , 사촌언니 따라 처음으로 술집이란 곳에 갔었다. 병원 주사약처럼 정확한 용량을 매김하고 나온 생맥주 500CC, 소변 색 같은 액체위의 하얀 포말을 보며 내안의 숨은 이야기를 그 용량만큼은 꼭 배설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하였다.

    그 날, 나는 취한다는 기분을 처음 느꼈으며 집으로 향하면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노래가 나왔다. 우리 가요도 아닌, 정확한 노랫말이나 뜻도 모르고 평소엔 잘 부르지도 않던 라는 깐소네였다. 집에 와서는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구토를 해야만 했다.

    다음 날, 취기에 불러댔던 노랫말이 저는 아직 나이가 어려요. 그대를 사랑할 나이가 아니에요라는 것을 알아내고는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노노레타>의 가사처럼 나이도 어린데 술맛이나 제대로 알았겠으며 짜릿한 사랑이란 감정을 느껴 볼 나이는 더욱 아니었다. 성인 신고식을 나름대로 거창하게 해 치웠던 그 밤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입안이 시큼하며 속을 뒤집는 구토의 경험은, 이토록 고통을 주는 술을 왜 마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 나도 마찬가지지만 우울할 때는 기분이 좀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감을 안고 마시고, 기쁠 때는 계속 그 느낌을 유지하고 싶어서 마실 것이다. 술은 사람의 본심을 다 드러나게 하는 묘약인 것 같다. 취하기만하면 사납게 변하는 사람이 있다. 있는 말 없는 말 다 하고, 했던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사람도 있고, 듣기 거북한 음담패설로 당황하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오히려 말이 적어지고,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세월을 이만큼 보내고 보니, 술을 이기지 못하고 구토를 해 대었던 날들이 더럽고 불쾌한 기분만 주는 것이 아니었다. 남들과 비슷해지기 위해 괜찮은 여인으로 세상의 중심에서 살아가려면 삶의 찌꺼기들을 가끔씩은 토해 내야만 할 때가 있다. 거칠게 돌아가는 세상 톱니바퀴 속에서 삶의 무게를 술과 함께, 기분을 적당히 조절해가면서 이제는 술의 묘미를 즐길 줄도 안다. 주량도 늘었다. 소주 반잔에서 세 잔으로 늘리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나에겐 장족의 발전이다. 사람들과 있을 때는 감정을 조절하며 조심하지만, 집에 와서는 불콰한 취기에 옛 생각으로 눈물짓기도 하고 음악은 볼륨을 높여 감상에 젖어 보기도 한다.

   아직도 밖에서 울고 있을 여인을 생각하니 연민이 생긴다. 오늘 밤, 세상이 그녀에게 먹여준 사랑, 웃음, 이별, 아픔을 모두 토해 낸다 해도,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배는 고파질 것이다. 밝은 아침에 세상으로 나가는 길에 가로수 밑 시신처럼 싸늘히 식어버린 토사물을 보며, 그녀도 나도 아니 다른 사람들도 애써 그 토사물에서 눈길을 돌리며 짐짓 바쁜 사람처럼 걸음을 재촉하겠지. 토사물은 흡사 새벽닭 울기 전에, 베드로에게서 세 번 씩이나 배신당해야 했던 예수처럼 뒷모습에 슬픈 눈길로 용서의 한 마디를 던질 것 같다.

     사는 게 다 그런거란다, 그래도 살아라.’

                                                                       2005년 현대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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