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편지
5월, 파란 하늘에 손이 닿지 않아 두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주머니에 챙겨 넣은 편지를 떠올리며 기대와 설렘이 컸으므로.
스승의 날, 서울에서 고등학교 친구들 9명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내 고향 정읍에 내려가는 중이었다. 호남고속도로에 들어서면서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집전화기에서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용건을 말씀하세요.’라는 녹음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시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내려올 줄 알고 선생님이 미리 피하신 모양이다. 어쩌지?
사실은, 내가 선생님을 찾아뵙겠다고 전화로 말씀드릴 때, 제자들이 부담 가질까봐 염려하셨던지 오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선생님 모르게 내려가는 중이다.
명화가 또 전화를 걸었다. 명화는 선생님과 친척간으로 여자 동창이다. 명화와 나,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 3단계 작전을 세웠는데, 일이 잘 풀리려는지 선생님이 전화를 받았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명화가 살갑게 인사를 한 뒤, 요양병원에 다녀오셨냐고 묻고, 누구는 언제 결혼을 하느냐는 등 집안 이야기까지 꺼냈다. 전화가 길어질수록 내 가슴은 콩닥콩닥 뛰고, 차 안은 숨소리조차 멎은 듯 조용했다.
나는 눈을 감고 선생님의 옛 모습을 떠올렸다. 선생님은 영어를 가르치셨는데, 스포츠형 머리에 약간 이마가 넓은 미남형으로 특히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한 마음이 앞서 선생님을 바꿔 달라고 명화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손가락으로 자기 입을 가리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오래도록 전화기를 붙들고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선생님이 사시는 아파트까지 결국 알아냈다.
“전화를 바꿔주면 선생님이 순순히 응하시겠어?”
“명화는, 스파이(?)래요.”
명화는 나를 나무라듯 하고, 나는 명화를 염탐꾼이라고 놀렸다. 친구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어떤 친구가 목욕탕에서 선생님을 만났단다. 목욕비를 내드리려고 해도 선생님은 마다하셨고, 선생님이 현직에 계실 때 다른 친구 두 명이 식사 대접하러 갔다가 오히려 붕어찜을 얻어먹고 왔단다.’ 그런 까닭에 명화한테 도움을 청했다. 선생님 모르게 우리가 세웠던 작전을 밀고 나가기로 하고 편지 한 통을 썼다. 작전은 이랬다.
2단계 작전--선생님이 전화를 안 받으면 명화가 요양병원에 찾아가고. 3단계 작전--선생님을 못 만나면 고향 친구한테 선생님 전해드리라고 편지를 놓고 오기로 했다.
선생님은 1단계에서 명화의 작전에 말려든 셈이다. 선생님이 사시는 아파트에 오전 11시쯤 도착했다. 일행은 차 안에서 기다리고 명화와 내가 선생님을 모시러 갔다. 명화가 초인종을 누르고 비디오폰을 등으로 가렸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렸다. 선생님이 명화를 바라보고 “내가 진작 눈치채고 피했어야 했는디,” 하시며 몸이 얼음처럼 굳었다. 내가 얼른 선생님께 다가가서 이름을 밝히고 선생님 두 손을 잡았다. “반장 하고 통화할 때 안 온다고 약속했잖아….” 선생님은 나를 쳐다보시면서 말끝을 흐리고, 나는 “선생님 손이 참 따뜻해요.”라고 딴전을 폈다. 선생님 손을 붙들고 얼굴을 바라보며 현관문 앞에서 말없이 서 있었다. 그때 명화가 “선생님 차 한 잔 주세요.” 하자, 엉겁결에 선생님이 앞서고 우린 따라 들어갔다.
거실에는 신문지가 차곡차곡 쌓여있고, 안방에서 전기장판을 사용하는지 전깃줄이 방 한가운데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사모님이랑 두 분이 계시다가 사모님이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지 10년이 넘었단다. 집안에서 찬 기운이 도는데, 커피포트에서 물 끓는 소리가 요란했다. 명화가 커피잔을 챙기고 선생님이 찬장에서 커피를 꺼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선생님 옆에 엉거주춤 서 있다가 수업시간에 들었던 우스갯소리를 흉내 냈다.
“비행기를 처음 탔는디, 똥구녁이 옴죽옴죽 혔단게.”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웃기만 했다. 세월이 흘러 미뤄 짐작하건대, 우리가 대학을 가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 혹은, 어떤 일을 마칠 때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말라는 뜻으로 들렸다. 비행기가 이착륙할 때 온몸에 힘이 잔뜩 실리고, 비행기를 타고 무심코 가다가 갑자기 기류가 바뀌면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리지 않는가, 라고. 선생님께 내 나름대로 설명까지 곁들였다.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듣고 웃고만 계셨다. 선생님 마음이 어느 정도 녹아내린 것 같았다. 선생님을 모시고 미리 잡아놓은 식당으로 향했다. 붕어찜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를 때 선생님께 모두 큰절을 올렸다. 그 후 나는 만년필로 쓴 손편지를 읽었다.
송상열 선생님께
선생님, 고등학교 졸업한 지 40여 년이 흘렀습니다. 스승의 날,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 대접하기로 친구들끼리 의견을 모았습니다. 선생님께 전화로 저희가 세운 계획을 말씀드리자 ‘제자들이 잘 있다는 소식만 들어도 고맙지.’ 하시며 저희더러 찾아오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모님은 치매로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고, 선생님이 날마다 미음을 준비해서 사모님을 떠먹인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한결같이 처음 마음먹은 대로 추진하자고 저를 다그쳤습니다. 혹시 선생님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는지요? 고향에 있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대구, 전주, 서울에서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서울에 사는 5명 친구는 참석지 못해서 죄송하다며 저한테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사모님이 병석에서 툴툴 털고 일어나시게 맛있는 것을 사드리래요. 선생님, 사모님, 힘내세요! 저희가 응원할게요.
제자 000 올림
편지 끄트머리에 친구들이 각자 이름을 쓴 다음 봉투에 넣어드렸다. 선생님과 제자의 만남! 처음엔 서로 서먹서먹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학창 시절의 별의별 일들이 실타래처럼 풀렸다. 한 친구가 ‘빠삐용’ 영화 이야기를 듣고 감격하여 마음에 깊이 새겼다고 하자, 누가 나서서 영화가 아니라 소설이라고 하고. 다른 친구는 웅변대회에 처음 나갔는데 많이 떨었다는 등, 또 다른 친구는 ‘학교 다닐 때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자, 선생님은 특별히 못 한 것도 없었잖아!’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단다. 이야기를 마치고 선생님 앞으로 머리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선생님은,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고마워, 고마워.”라고 연거푸 말씀하셨다.
한국산문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