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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의 드라마    
글쓴이 : 노정애    17-09-05 20:18    조회 : 5,757

엄마의 드라마

노정애

 

몇 해 전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셔서 며칠 머문 적이 있다. 당신의 취미는 드라마를 보는 것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방송 삼사를 옮겨 다니며 시청하셨다. 함께 앉아 있는 내게 각 드라마의 간략한 스토리와 누가 나쁜 사람이고 착한 사람인지를 설명해주며 열중하신다. 저녁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많은 드라마가 방송되는 데에도 놀랐지만 복잡하게 꼬여있는 황당한 이야기를 막힘없이 술술 풀어내는 엄마의 기억력에 더 놀랐다. 생각해보면 오랜 시간 치매로 고생하셨던 시어머니는 어느 순간부터 드라마를 보지 않으셨다. 후일 알게 되었지만 달아나는 기억력이 드라마의 내용들을 더 이상 저장하지 못했던 것 같다.

김해 친정에는 올해 백수인 외할머니와 여든을 넘긴 친정어머니 두 분이 사신다. 외할머니는 6·25때 남편을 잃고 혼자서 6남매를 키우셨다. 사업실패로 쓰러져서 8년을 누워만 지내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혼자된 엄마와 살림을 합쳤다. 큰아들과 큰사위를 먼저 보낸 외할머니는 너무 오래 살아서 주변을 힘들게 한다고 말씀하시곤 한다. 그러나 엄마 곁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서 좀 더 사셨으면 하는 게 내 욕심이다. 몇 년 전 형부가 돌아가시면서 엄마도 큰사위를 먼저 보냈다. 두 분은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어루만지며 지내신다. 주어진 오늘 하루의 삶에 감사하다며 서로를 챙기신다. 어쩌면 두 분의 외로움이 드라마 보는 취미로 이어진 것은 아닌가 하여 마음 한 편이 아려왔다.

그 날 이후 막장드라마가 윤리와 도덕적 측면에서 나쁘다고 언론에 나오면 엄마가 떠올랐다. 선량한 주인공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면 더 안타까워하고, 악한 사람에게 저거 진짜 악질이다,”며 열중하시던 그 모습이 겹쳐지곤 했다. 자극적 전개를 위해 폭언이나 폭행이 난무하면 폭력 불감증을 부른다고 염려하는 목소리도 높지만 엄마에게서 그런 모습을 본적은 없다. 오히려 엄마가 좋아하는 달달한 로맨스 드라마를 나도 좋아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 때면 나이의 벽은 저만큼 물러가 있었다. 여주인공보다 더 행복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 소녀 같은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은 내게도 즐거운 일이었다.

엄마가 드라마를 보는 것만큼이나 나는 소설 읽는 것을 좋아한다. 다음 회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며 다양한 소재와 파격, 뛰어난 작품성까지 갖추면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빠져든다. 엄마 딸이니 그 피가 어디 가겠는가.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최초 연애소설이라는 데에 마음이 빼앗겨 성녀와 마녀를 읽었다. 첫 장면부터 심상치 않았다.

저명한 외과의 안박사의 딸, 수미의 생일파티가 열리고 있다. 오빠 수영은 정원에서 형숙과 사랑을 속삭인다. 이때 안박사가 와서 형숙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그리고 아들에게 형숙의 출생의 비밀을 들려주며 둘의 결혼은 안 된다고 한다. 형숙은 바로 뒤 나무 밑에서 부자의 대화를 듣고 기절한다. 엄마가 보는 막장드라마를 연상케 하는 전개에 놀라서 다시 한 번 발표연도를 확인했다. 광복 후 우리나라 최초의 월간 여성잡지였던 여원1960년 연재되었던 소설이었다.

월간 연재소설이라서인지 시작은 다소 파격적이다. 매회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삶은 사랑, 결별, 재회, 갈등, 파혼, 유학등 요즘 드라마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 읽고 나서야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사회의 편견 속에서 얼마나 진실하게 살고 있는지 묻고 있었다. 시작은 막장인데 마지막의 울림은 명품이었다. 우리를 사로잡는 이야기들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TV드라마가 없던 그 시절 매달 잡지를 기다렸을 여인들의 심정이 매일아침 TV앞에 앉는 어머니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 친정에 갔다. 두 어른에게 놓친 드라마를 언제든 볼 수 있는 케이블 TV가 효자노릇을 하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뉘집 자식인데 저리 훤하게 잘 생겼냐해를 품은 달의 주인공 김수현을 보면서 열중하시는 모습에 모전여전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어머니의 드라마 사랑도 여전하다. 형제들과 자식들에게 보내주는 감자, 고추, , 고추장, 된장, 간장, 젓국까지 무엇 하나 당신의 손길이 안 닿은 것이 없는데 언제 시간이 나서 그것들은 다 보시는지 내게는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한해 드라마가 100편 이상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러니 황당하고 재미있고 신선한 드라마가 오래도록 외할머니와 엄마의 취미생활이 되어줄 것이다. 행복한 취미에 외로움이 끼어들 틈은 없다. 드라마를 볼 수 있다면 기억력도 좋은 것이리라. 수출 효자상품인 명품드라마도 욕먹는 막장드라마도 좋으니 오래오래 그런 시간들이 계속되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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