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오길순
“여보, 바람도 따스하니 호수로 날아볼까?”
한 쌍의 캐나다거위가 속삭이는가 싶은 순간 내달리기 시작했다. 탭댄스를 추는 부부가 그러할까? 100여 미터 나란히 질주 할 때는 쌍둥이 장대높이뛰기선수가 도움닫기를 하는 것도 같았다. 네 개의 발톱이 괴성을 울릴 때마다 상처로 할퀸 잔디밭도 툭툭툭 흙을 마구 토해놓았다.
몇 년 전, 영국의 요크박물관에서 만난 캐나다 거위 한 쌍은 비상의 의미를 일러주었다. 네 개의 날개가 맞바람을 치며 사정없이 퍼덕거릴 때마다 괴물처럼 가속도가 더해졌다. 드디어 고요히 떠오를 때는 그 우아함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죽음을 무릅쓴 듯 간절히도 질주한 끝에 얻어낸 비상의 순간이 참으로 고요해서 눈물겨웠다.
우리네 삶도 활주로가 필요할 때가 있다. 언덕 높이 도움닫기를 해야 할 때도 있다, 괴물처럼 가속도를 더해야 할 때도 있다. 신은 최선을 다했을 때에야 비로소 목적지를 조금씩 보여주는 것도 같았다.
고향마을 앞에 너른 호수가 있었다. 해마다 하짓날이면 물문이 열리는 반 호수였다. 사람들은 하지를 간절히 기다렸다. 서해로 금강으로 호수물이 흐르면 드러나기 시작한 개펄논에 그득한 물고기를 잡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들녘에서 풍년을 이루고 싶은 마음, 모내기가 간절했다. 나는 호수 위를 나는 겨울철새들을 간절히도 기다렸다.
하짓날 호수의 물이 빠지면 물고기가 가마니로 잡혔다. 인근 군부대에서도 가마니로 잡은 물고기를 지프로 싣고 갔다. 온 몸이 진흙탕에 빠져도 아이들은 학교운동장인 양 논에서 흥청거렸다. 사람들은 골목마다 술판을 벌이고, 허물어진 논두렁에서 풍장소리 울리며 흥겹게도 모내기를 시작했다.
해방 전에 만든 인공저수지 ‘무시기’는 입동 즈음이면 다시 물이 찰랑한 저수지로 변했다. 추수와 저수를 번갈아 바꾸는 호수, 지금은 사철 딸기밭이지만 몇 십 년 전 그 곳은 가을까지 논이었다가, 한 겨울이면 철새들이 가득한 호수로 변했다.
나는 하루에 두 번 씩 그 곳을 오갔다. 여학교 가는 20리 길 초입이며 집으로 돌아올 종점인 때문이었다. 수양버들 늘어진 호숫가를 지날 때면 늘 설레었다. 한 폭의 풍경화 주인공인 양 가슴이 뛰었다. 오렌지 빛 햇살이 물안개에 스며들고 새들이 눈을 뜨는 아침호숫가에 서면, 가보지 못한 서호가 저러할까 싶었다.
특히 얼음장 조이는 겨울날이면 그 곳은 천혜의 썰매장이 되었다. 눈이라도 내리면 멀리 다소곳한 마을 앞으로 줄줄이 늘어선 갯버들은 한 장의 크리스마스카드가 따로 없었다. 함박눈을 뒤집어 쓴 채 갯버들 설원을 걸을 때면 나는 한 마리 백조가 된 듯 팔 벌려 내달리곤 했었다. 그 곳은 작은 소녀에게 무한한 꿈을 안겨주는 곳이었다.
동네 뒷동산 벼랑에 물새구멍이 많았다. 호수를 오가는 물새들의 둥지였다. 물떼새들도 총총총총 호수에서 참방거리다가 그 곳에서 부화를 했다. 호수에서 놀다가 쉬어가기도 하는 철새들의 쉼터가 물새구멍이었던 셈이다.
나는 늘 마을 멀리서 호수에 우아하게 떠 있는 백조가 궁금했다. 고니라고도 하는 백조의 그 큰 몸집이 어떻게 하늘에 떠오를까? 몇 십 년 후에야 궁금증이 풀렸다. 잔디밭을 활주로 심던 요크박물관의 캐나다거위처럼 고니도 호수 위에서 도움닫기를 했을 것이다. 100여 미터 잔디밭을 전력질주 끝에 떠오르던 거위처럼 최선을 다해 비상했을 것이다. 여름이면 러시아의 아무르 강이나 몽골의 습지에서 식구를 불려 간절히도 무시기로 다시 날아왔을 것이다.
얼마 전, 강변도로를 운행 중이었다. 오른 쪽 가드레일 위에서 이상한 물체들이 회전하고 있었다. 빨강노랑파랑색으로 유혹하는 로봇장난감자동차들이었다. 선 그라스를 어둡게 썼어도 판매원의 눈빛이 참으로 간절해 보였다. 자동차 상습정체구간에 진열했을 장난감들, 위험을 무릅쓴 백조가 가드레일에서 전력을 다해 서커스를 하며 도움닫기를 하는듯 애달파졌다.
하필 빠른 속력이어 장난감을 살 수 없는 게 아쉬웠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닫기’ 중일 그가 어서 비상하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시대 이태백사오정일지도 모를 젊은이가 한강변 가드레일이 생애 가장 멋진 활주로였다고, 기쁘게 웃을 날 꼭 있기를.
(마음의 양식 <<행복의 나라로>>,국방부.2018. 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