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밥그릇
늦가을 햇살이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더 무겁게 할 때 감나무는 힘에 겨운 듯 어깨가 축 늘어졌다. 붉게 물든 감이 손에 잡힐 듯하여 창문을 열었다. 3층 내 방에서 정 여사네 집 감나무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정 여사가 자기 집 베란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숙인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이놈 안 갈래.” 하며 큰소리를 지르더니 페트병 2개를 마당으로 던졌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정 여사와 눈이 마주치면 괜히 민망해할까 봐 창문을 닫았다. 옆집에 살면서 정 여사가 목청을 높이는 것을 처음 보았으므로.
사나흘 지나 해질 무렵, 정 여사를 길에서 만났는데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손을 다쳤냐고 묻자, 무작정 내 손목을 끌고 자기 집 마당으로 갔다. 마당 한편에 꽃밭이 있고 감나무가 있는데, 감나무 밑에 개집 같은 게 있었다. 평상에 앉자마자 정 여사가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꽃밭에 물을 주다가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었죠. 사방을 두리번거렸더니 감나무 밑에서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 야옹’ 하며 웅크리고 있었어요.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서 집도 지어주고, ‘가을이’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날마다 밥을 주었죠. 베란다에서 가을이 밥 먹는 것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봤습니다. 어느 날 가을이 밥을 주는데, 등 뒤에서 큰 고양이가 어슬렁거렸어요. 가을이는 이미 도망가고, 큰 고양이가 주위를 맴돌다가 밥그릇에 주둥이를 밀어 넣을 때였죠. “이놈, 맛 좀 봐라.” 하며 고양이를 손으로 때리는 시늉을 했어요. 고양이가 도망갈 줄 알았는데 눈에 쌍불을 켜고 달려들어서 내 손을 물었답니다. 손에서 피가 줄줄 흘렀어요.”
고양이한테 물려서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는 정 여사 이야기를 듣고, 미국의 작가 켄 윌버의 <모든 것의 역사>라는 책 한 구절이 떠올랐다.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은 더 높거나 더 낮은 것도 없이 더 좋거나 더 나쁜 것도 없고, 동등한 권리와 평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존재는 가장 진보되고 그래서 가장 많은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권리가 다른 살아 있는 존재들을 힘으로 누르는 권리를 포함하지는 않는다.’라고 했다.
나는 큰 고양이 입장에서 정 여사를 바라보았다.
“정 여사! 작은 고양이만 밥 주고, 왜 나는 안 줘?”
큰 고양이가 정 여사한테 대들었다.
“내 맘이여!”
정 여사가 답했다.
“심술이 나서 작은 고양이 밥 좀 뺏어 먹기로 서니, 허구한 날 이놈 저놈 하면서 물병을 던졌소. 어떤 날은 서류뭉치도 던집디다. 간 떨어지게!”
“그래도 그렇지 이놈아! 밥 안 준다고 손을 물어뜯어.”
“눈칫밥도 한두 번이지, 정 여사가 욕하고 물병을 던지는 바람에 밥그릇을 코앞에 두고 도망을 쳤단게. 배고픈 설움보다 정 여사가 나한테 “이놈, 저놈.” 하는 말이 가슴에 대못처럼 박혔소. 정 여사 손에 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 텐데, 내 가슴에 보이지 않은 상처는 얼마나 깊은지 정 여사가 알랑가 몰라?”
내가 잠시 큰 고양이와 정 여사를 번갈아 가며 상상을 하는데, 정 여사가 붕대 감은 손을 내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손을 좌우로 흔들며 말을 이었다.
“가을이 밥을 챙겨주고 2층 베란다에서 지켜봤어요. 그런데 큰 고양이가 가끔 나타나서 가을이를 쫓아내고 밥그릇을 차지합디다. 화가 치밀었죠. 내가 소리치면 나 한 번 쳐다보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나중에는 밥그릇이 구멍 날 정도로 핥습디다. 그 모습을 보고 당신 같으면 보고만 있겠어요? 아니면 못 본 체 하겠어요? 큰 고양이가 나타나면 혼내주려고 플라스틱병을 모았어요.”
정 여사 이야기를 나는 듣고만 있었다. 정 여사는 2층 베란다에서 두어 달 남짓 가을이 밥 먹는 것을 지켜보며, 큰 고양이가 나타나면 쫓으려고 물병을 던졌단다. 고양이가 정 여사한테 해코지했다는 소문이 동네에 파다하게 퍼졌다.
나는 정 여사를 위로한답시고“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대요.”라고 얼버무렸지만, 고양이는 개만도 못해서 건드렸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큰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 밥그릇을 빼앗아도 당신 같으면 보고도 못 본 체 하겠어요?” 정 여사의 질문이 내 귀에는 “당신의 밥그릇을 힘 있는 자에게 빼앗겼을 때, 입도 뻥긋 못하고 새끼 고양이처럼 당하고만 있겠소?”라는 물음표로 들렸다.
잠시 후 정 여사를 힐끗 바라보았다. 정 여사 눈가에는 물기가 촉촉이 젖어있었다. 밥을 주려고“가을아!”새끼 고양이 이름을 불러도 며칠 전부터 나타나지 않는단다. 소슬바람이 불어 감나무잎이 떨어지고, 떨어진 낙엽은 땅바닥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나도 덩달아 늦가을에 서서 서성거리고 ‘가을이’ 밥그릇이 고양이 집을 지키고 있다.
문예바다 2018 겨울호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