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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지방을 넘을 때    
글쓴이 : 이기식    19-11-30 20:58    조회 : 4,944

                                                  문지방을 넘을 때

                                                                                                           이 기 식(don320@naver.com)

 

<수필과 비평, 2018년 12월호 발표분 수정보완>

 

  어느 날 좋아하고 아끼던 것이 갑자기 싫어지고 미워질 때가 있다. 좋은 식당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기분 좋게 나오다가 식당 옆에 있는 음식물 쓰레기통이 눈에 띄었을 때가 그렇다. 좀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음식물의 남은 것들과, 다른 여러 가지 찌꺼기들이 범벅이 된 채 버려져 있는 모양은, 정말이지 두 번 다시 보기 싫다.

  침도 그렇다. 입안에 있을 때는 소독도 해 주고 소화도 잘 시켜 주니 고맙기만 하다. 침을 회춘 비타민이니 옥수라니 하면서 농담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도 뱉어 버리면 상황이 바뀐다. 순식간에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으로 변한다.

  며칠 전, 주민등록등본이 필요해서 주민센터 갔다. 입구에 민원서류 무인발행기가 놓여 있었다. 지문을 갖다 대면 확인하고 필요서류를 인쇄해 주는데 아무리 엄지손가락 지문을 갖다 대어도 인식이 안 된다고 퇴짜를 놓는다. 아마 열 번쯤은 시도한 것 같다. 결국은 담당 직원을 찾았다. 그가 지문을 대니까 단번에 인식한다. “연세가 있으셔서 지문이 다 닳아 버렸네요! 그런 분들이 가끔 계십니다.” 듣지 않았으면 좋을 말이었다. 찌꺼기 음식이나 뱉어버린 침과 같은 신세가 되어가고 있는데 거기다가 다 닳아버렸다고 하는 소리까지 듣다니.

  요즈음 나이 때문인지 새벽에 잠이 자주 깬다. 그때마다 '그냥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좌우명을 갖고, '품삯' 받으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택한 나로서는 무엇하나 해놓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내가 싫을 때마다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오래전에 집안에 굴러다니던 야담 잡지에서 읽은 이야기다. 거기에 나오는 걸인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어떤 지방에,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걸식하는 일자무식 거지가 있었다. 계속 며칠째 굶어서 배에서 '쪼르륵' 소리를 내며 어떤 마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마을에는 양반 행세를 하고 싶어 안달하고 있는 돈 많은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마침 새로 지은 정자의 현판을 써줄 사람을 수소문하는 중이었다. 그 소문을 들은 걸인은 체면 불고하고 그 집에 들어가 ‘지금은 얻어먹는 거지 신세이긴 합니다만 서예에는 이미 달통한 선비’라고 점잖게 자기소개를 했다.

  몰골이나 행색이 좀 마음에 걸렸으나 다른 사람을 달리 구할 시간도 없고 현판은 빨리 걸고 싶은 마음에 부탁하기로 하였다. 걸인의 길고 긴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린 뒤, 붓과 종이가 마련된 곳으로 안내하였다. 넓은 마당에는 구경하러 온 동네 사람들이 주~욱 둘러 서 있었다.

  걸인은 잠시 주저하는 듯했으나, 곧 붓에 먹물을 흠뻑 적셨다. 걸인의 손이 허공에서 화선지 위로 순식간에 내려온다. 그리고는 사람과 글이 한 덩어리가 되어 붓을 한참을 옆으로 끌고 간다. 걸인의 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흐르는 것이 보였다. 어떤 이는 걸인의 몸에서 '오라'가 나오는 것을 본 것 같았으나, '햇빛이겠거니' 생각했다.

  조금 후, 갑자기 동네 사람들의 눈이 둥그레지기 시작했다. 걸인이 글쓰기를 끝내자마자 갑자기 옆에 있던 삿갓을 집어 들고 냅다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허겁지겁 달려 나가던 그는 어이없게도 문턱에 걸려 허깨비처럼 풀썩 넘어졌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계속 쳐다보고 있던 주인이 쫓아가 보니 이미 저세상으로 간 뒤였다. 겁(劫)의 세월에 쓸 기운을 찰나(刹那)에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늦게서야 그 지방의 서예가가 도착하였다. 마당에 쓰여 있는 글씨를 한참을 응시하더니, '내 생전에 이렇게 힘 있는 글씨는 처음 보았소'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정신이 나간 채로 문지방을 건너다 명을 다한 걸인의 편안해졌을 얼굴을 그려본다. 걸인은 마지막 한순간이지만 자기 일을 하고 간 셈이다. 걸인과 나를 비교해 본다. 사람은 태어나서 어머니와 같이 문지방을 건너 삶이란 방에 들어왔다. 그러나 나갈 때는 자기의 업을 본인이 지고 문지방을 건너야 한다. 내가 가지고 갈 업은 대체 무엇일까.

  문지방 앞에 있는 쓰레기통이 유난히 신경 쓰이는 아침이다. (2019/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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