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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날의 노래    
글쓴이 : 오길순    20-01-23 10:33    조회 : 4,358


                                

                                         칼날의 노래

                                                                         오길순

  밤바다는 포경선 같았다. 작살을 겨누는 듯 날카로운 귀곡성에 오금이 저렸다. 불규칙한 파도소리는 순한 고래의 호흡을 더욱 가쁘게 했다. 내일, 201812614202심판결이 가까울수록 호흡은 초각을 다투듯이 무너졌다

사실 한 번 더 패소해 보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도 빨랫줄에 꿰인 수정처럼 투명한 진실을 재판정에서 잘 살펴봐주시라는 간청이었다. 2년 이상 기다린 1심 패소였는데 단 두 번으로 종결하겠다는 2심은 또 무엇인가?    

정동진의 수요일 밤은 폐촌이 무색했다. 자동차 하나 지나지 않는 큰길은 건물의 사층까지도 적막하게 만들었다. 지난날 구름처럼 몰려오던 해맞이 객들은 어디로 갔는가? 낭만의 무궁화 호 평화가 쾌속철의 억척스런 질주를 어쩌지 못했나 보았다. 용광로처럼 펄펄 끓는 온돌방이 25천원이라니, 또 다시 해맞이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올 때는 언제인가?

황태국 집 주인은 일 년 중 해 뜨는 날이 몇 날 안 된다고 말했다. 삶도 그러하리라. 해 돋는 몇 날을 찾으려 겨울 나그네처럼 해변을 떠도는 게 인생인지도 모른다. 몇몇 해맞이 객들도 이른 아침 우산을 쓴 채 해변을 터벅터벅 돌아나갔다. 나도 다시는 해가 떠오를 것 같지 않은 야속한 해변에서 태백선으로 향했다.

태백선은 신선도 같았다. 어젯밤 칠흑 같던 자리에 달빛을 뿌린 듯, 매화꽃을 피운 듯 달빛매화신선도가 펼쳐있었다. 산맥 골골이 그린 투명한 수정 상고대에서 신선가가 들리는가 싶었더. 무량한 백수정으로 펼친 억새산 민둥산 신선도도 천상의 현을 타는 듯 했다.

세상 끝날 태백선 눈꽃열차를 타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순백의 눈꽃열차를 타면 세상 참 아름다웠노라 노래하듯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태백선은 눈꽃열차보다도 아름다웠다. 그 속에 풍덩 뛰어든다면 몰이꾼에 몰린 고래의 분노도 투명하게 얼어버릴까?

태백산맥의 안개구름은 신부의 면사포 같았다. 하늘과 땅의 이음새도 없이 자락자락 펼쳐 있었다. 상고대 풍경에 판결의 두려움도 잠시 잊었나 보았다. 손등의 솜털까지도 서리꽃으로 피울 듯 차가운 창 틈새의 한기도 반가웠다.

지금 쯤 김기자는 법정에 도착했을까? 법정에 대신 참석하겠노라 했을 때 한없이 고마웠다. 무시무시한 법정에 다시는 서고 싶지 않았다. 그는 승리를 믿었다. 정의의 두루마기를 입은 판관이라면 왜곡판결을 할 리 없다고 장담했다. 정의를 확신하는 그들 덕분에 내 숨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리라.

원주를 지나 동화 어디쯤에서 불안한 마음 겨우 손 전화를 켰다. 김 기자 대신 온통 수능 소식이다. 어젯밤 수능을 본 소년소녀들도 지극히 불면했나 보았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인생등용문 혹은 인생 판결문 앞에서 절대고독을 홀로 견뎌야 했을 그들.

자식을 길러보면 이해 안 되는 게 없다. 숨 가빴을 소년소녀들이 어서 고니처럼 훨훨 날기를. 실패가 성공의 씨앗이었다며, 함박꽃 같은 웃음 웃는 날 꼭 오기를.

다시 1999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포경선에 잡힌 고래처럼 더는 인권을 유린당하고 싶지 않다. 지난 몇 년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세월, 오류의 판결문 앞에서도 작살 맞은 고래처럼 떨어야 했다. 그러나 어쩌랴! ‘어머니 찾아 삼 만 리가 포경선의 무차별 작살에 산채로 포획되었을 줄을. 어머니의 가련한 영혼이 미아처럼 우주를 떠돌아야 하는 이 슬픔을.

법이 으뜸이라고만 여겼었다. 법을 지키는 것만이 세상 도리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정상을 비정상으로 만드는 곳도 그 곳 같았다. 어찌하여 가해자가 승리의 월계관을 쓸 수 있는가? 20년 가까이 피해자 인권을 유린하고도 그리 당당할 수 있는가?

솔로몬처럼 선한 미소를 띤 판관은 공평의 두루마기를 방패삼아 칼날의 노래를 불렀는지도 모른다.

 

                      2020.1월호 <<한국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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