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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다툼    
글쓴이 : 이성화    20-05-15 14:27    조회 : 5,351

영역 다툼

이성화

 

 오락가락하는 장맛비에 며칠 동안 실내에서 빨래를 말렸다. 반짝 날이 개길래 얼른 밖으로 나갔다. 여섯 식구의 빨래를 위해 텃밭 한쪽에는 건조대 두 개와 빨랫줄이 있다.

 나가보니 건조대에 그새 또 거미가 집을 지었다. 새끼 거미인지 원래 크기가 작은 종류인지 색깔도 희끗희끗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거미줄은 어찌나 촘촘한지. 크기가 모기보다 작다고 하면 나는 절지동물인데.”라며 자존심 상한다고 하려나. 요 작은 녀석들에게 건조대는 까마득한 높이일 텐데. 실없는 생각을 하며 휴지로 거미줄을 걷어내고 거미를 나뭇가지로 옮겨놨다. 마당에 사시사철 두는지라 낡은 건조대는 언제부턴가 거미들이 수시로 집을 지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텃밭 관리가 소홀해지자 건조대 주변에 잡초가 돋으면서부터인가보다.

 본의 아니게 자연 친화적인 모습으로 서 있는 스테인리스 건조대를 물티슈로 박박 닦아내고 빨래를 널었다. 사실 장마가 시작되기 전부터 거미와 힘겨루기를 계속하던 참이었다. 거미줄을 걷어내고 빨래를 널었다가 걷고, 그다음 빨래를 할 땐 또 거미줄을 걷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계속 그러다 보니 누가 이기나 해보자 했다가 짜증도 났다가 결국엔 조그만 놈들이 참 끈질기다 항복하고 싶었다. 어쩌면 재개발 철거지역에서 농성하는 이들처럼 갈 곳 없이 내몰려 절박한 상황일지도 모른단 생각까지 설핏 들었다. 그날부터 거미줄을 걷어낸 휴지에 거미를 잘 태워서 나뭇가지에 올려주었다.

 

 남편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전셋집을 내놓고 월세로 갔다가 보증금도 다 까먹고 친정살이를 결정하고 이 집으로 들어왔었다. 몇 년 사이에 요양원으로 가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까지 암이 재발해서 돌아가셨다. 남동생과 우리 부부와 아이들 셋은 여전히 부모님 집에 살고 있다.

 건물등기는 남동생 명의로 상속 변경할 예정이지만 땅은 구청 소유지다. 매년 일정 사용료를 내거나 땅값을 내고 구청에 매매신청을 해야 한다. 텃밭으로 사용하는 땅은 근처 여대 소유지만 주택가 사이라 비워둔 것을 임시로 쓰는 것이니 어쩌면 우리보다 거미나 개미에게 우선권이 있을지도 모른다. 전 세계에 2만 종이 넘고 우리나라에도 600여 종이 있다는 거미는 해로운 곤충을 잡아먹기 때문에 인간에게 이로운 곤충, 아니 동물이다. 텃밭에만 나가면 달려들던 모기가 올 여름은 뜸한 이유가 건조대에 이사 온 거미들 덕은 아닐까.

 

 어찌 됐든 여섯 식구의 빨래는 쉼 없이 나왔고 거미 이주시키기 작전은 계속됐다. 새로운 거미가 자꾸 나타나는 건지 스테인리스 골조가 마음에 들어 되돌아오는 건지 영역 다툼에서 승리할 조짐이 영 보이지 않았다. 건조대 아랫부분은 햇빛이 잘 닿지 않아 쓰지 않기에 그쪽에 있는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는데 굳이 위층을 선호하는 녀석들이 계속 은실을 뽑아냈다. 한번은 빨래집게에 큰 거미가 앉았길래 털어내려 했다. 작은놈들은 쉽게 떨어지는데 덩치가 크다고 힘도 센가 떨어지질 않았다. 자세히 보니 빨래집게 안쪽에 자그마한 거미 새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빨래집게 하나를 포기하고 나뭇가지에 꽂아 놓았다. 이쯤이면 이제 안 오겠지 하고 이삼일쯤 지났을까. 작은 녀석이 다시 돌아왔다. 강제 이주시킨 녀석들이 돌아온 것인지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수 없었다.

하기야 마다가스카르에서는 25m나 되는 거미줄도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손바닥만 한 텃밭 어디로 옮겨놓은들 저들이 원하는 곳이 곧 그들의 영역일 테다. 내가 아무리 요기까지는 내 땅이야.” 하고 선을 그어 봐야 녀석들이 뿜어낸 은실이 닿는 곳이 그들이 원하는 곳일 뿐, 내가 그은 선은 의미가 없다. 갈 곳 없이 내몰린 것은 자유로운 녀석들이 아니라 아무리 발버둥 쳐도 온전한 내 땅, 내 집 하나 없는 나였다. 아이들 데리고 편히 쉴 공간 있으면 되지, 죽을 때 떠메고 갈 것도 아니면서 욕심부릴 거 없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내 것.’이라고 못 박을 무언가가 필요했었나 보다. 건조대 하나까지 거미들에게 빼앗기기 싫어 옹졸해진 마음이 되지도 않는 영역 다툼을 벌인 거였다.

 이쯤에서 후퇴해야 하나, 패배를 인정하고 남편에게 빨래건조기를 사달라고 해야 하나 싶다. 활자라고는 작업지시서밖에 안 읽는 남편이 이 글을 볼 리 만무다. “앓느니 죽지.” 하는 친정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르바이트 월급 받으면 아이들 학원을 보낼 게 아니라 건조기 살 돈을 모아야 하려나 보다. 그때까진 천연모기장이라 생각하고 동거(同居), 동락(同樂)해 봐야지.


<한국산문> 2020년 2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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