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을 보기 힘들었던 나만의 이유
이성화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4관왕에 올랐다는 기사가 나올 때까지 나는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 영화 자체가 대단한지, 아카데미 4관왕에 오른 것이 대단한지, 만나는 사람마다 대단하다며 말을 얹었다. 다른 사람들의 평만 듣고 있자니 궁금증이 일었다. 개봉했을 당시에는 사회계층 어쩌고 하는 평을 듣고 선뜻 볼 수 없었다. 어쩐지 내게 어려운 영화일 것 같다는 생각에 비장한 각오로 TV 앞에 앉아 ‘아카데미 4관왕 기념 할인 영화 기생충’을 선택하고 결제했다.
영화의 초반부부터 나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기우네 식구가 지내는 반지하 집은 남편 사업이 힘들어지며 잠시 이사 가서 살았던 집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 집에서 살던 네 사람이 각자 다른 역할로 한 집에 모두 취업했을 때부터 가슴 속은 영화의 효과음보다 한 박자 더 빠르게 둥둥거렸다. 초조함은 집주인 식구가 캠핑을 간 사이 기우네 식구들이 자신들의 집인 양 편안하게 자리 잡은 모습을 보며 더해졌다. 그 집 지하에는 전 가정부 문광의 남편이 숨어 살고 있었고, 그가 걱정되어 들이닥친 문광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두 가족은 말도 안 되는 난투를 벌였고 그사이 갑작스러운 폭우로 캠핑을 취소하고 집주인 식구가 돌아온다는 연락이 왔다.
상황은 더 뒤죽박죽이 되어갔고 나는 결국 리모컨을 들어 ‘빨리감기’ 버튼을 눌러버렸다. 배우들이 소리 없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우와 동생 기정, 아빠 기택이 숨어 있는 테이블과 그 바로 옆 소파에서 가벼운 정사를 나누는 주인 내외 동익과 연교가 빠르게 지나갔다. 잠든 둘을 피해 비를 맞으며 거리를 달리는 세 사람, 쏟아지는 폭우에 잠겨버린 기우네 반지하도 속삭임조차 없이 숨 가쁘게 지나갔다. 햇살이 비추는 연교의 마당에서 파티를 준비하는 모습이 나오는가 싶더니 피 칠갑을 한 근세가 칼을 휘두르고 순식간에 이 사람, 저 사람이 피를 흘리고 기우가 병실에서 눈을 뜨는 장면까지 넘어갔을 때 ‘스탑’ 버튼을 눌렀다.
죽을 사람은 죽고 남을 사람은 남았다. 어찌 됐든 상황은 정리가 된 것이었다. 마침 저녁 시간이 되었고 식구들의 저녁을 챙기며 영화를 잠시 뒤로 미뤄두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까지 하고 다시 TV 앞에 앉았지만, 영화를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영화에 나온 인물들의 힘겨운 상황이 고스란히 내게 들어와 두통이 일었다. 내가 견디기 힘든 것이 단순한 소동극인가 생각해보았다. 일면 그런 이유도 있었으나 그렇게 견디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영화의 결말에 대한 궁금증도 미뤄둔 채 밤늦게까지 아니, 몇 날 며칠 내가 견디지 못한 영화 속 상황이 무엇인지 찾아 헤맸다.
막 대학을 입학했을 무렵이었을까. 지하철 4호선이 ‘안산’까지 연장 개통되어 몹시 붐비던 때였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지하철 안에서 목탁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슬쩍 고개를 돌려 힐끔 보았다. 아버지였다. 걸망을 메고 목탁을 치며 탁발을 하는 중이었다. 눈이 마주칠까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아버지도 나를 본 것 같았고 서둘러 다음 칸으로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같이 있던 친구는 내가 창피한 마음에 그랬을 거로 생각했는지 그러는 거 아니라고, 나중에 아버지 돌아가시면 얼마나 후회하려고 그러냐며 진심 어린 충고를 했었다. 맹세컨대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일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그때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얘기하지 못했지만 나는 아버지가 창피했던 게 아니었다. ‘중의 딸’이라는 내 존재가 아버지에게 가하는 ‘손가락질’이 두려운 거였다.
엄마는 ‘시줏돈’으로 먹고 살았으니 그 빚을 다 갚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아이를 낳고 나이 마흔이 넘도록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결국 엄마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엄마가 만날 빚 갚아야 한다고 빚타령을 해대서 내가 빚더미에 올라앉은 거야. 안 그래도 빚 갚느라 허덕거리고 사는데 꼭 그렇게 빚, 빚 해야겠어?” 엄마 가슴에 못 박는 것으로 돌려드렸다.
어쨌든 법당에 앉아 염불을 외거나, 승복을 입고 걸낭을 메고 탁발을 나가는 아버지는 완벽한 수행자였다.
우리 시대 아버지들은 가정적이지 않았다. 바람을 피우고 술주정을 하며 가장의 역할을 다하지 않는 아버지도 많았다. 그런 시대여도 우리 아버지는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적어도 자식들에게 그런 모습은 보이지 말았어야 했다. 간혹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땡중이 곡차라며 술 몇 잔 마시고 휘청거리는 술주정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 시절 가장으로 힘들었을 한 남자의 어려움이나 속세의 인연을 차마 끊지 못한 수행자의 고뇌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게다.
아버지의 술주정은 온 동네 사람들이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다. 새벽에 승복을 입고 예불을 했던 사람이 저녁에는 만취해서 동네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며 욕을 퍼붓고 다녔다. 길바닥에 오줌을 갈기고 아무 데나 쓰러져 자는 것은 예사였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하루가 멀다고 내 이름이나 동생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렸다. 길바닥에 쓰러진 아버지를 데려가라는 거였다. 그 뒤에는 항상 쯧쯧거리는 소리가 따라왔다. 취한 아버지가 깨끗한 몰골로 집에 들어오는 날은 거의 없었다. 왜소한 체격의 엄마가 아버지를 끌어다 방에 눕히고 옷을 갈아입히는 일은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일이었다. 그렇게 취해 잠이 든 아버지는 그 자세 그대로 소변을 보는 일이 허다했다. 사흘거리로 이불 빨래를 해대는 엄마를 보고 사정 모르는 동네 아줌마들은 너무 깔끔 떤다며 흉을 보기도 했다. 어쩌면 사정을 짐작하며 빈정댄 건지도 모르겠다.
그 이중성을 견디는 일이 내게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중의 자식’이라는 내 존재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어야 하는가 싶었다. 엄마와 죽일 듯이 싸우는 술꾼 아버지는 내게 필요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릴 때는 부모 말을 잘 들었다. 하지 말라는 건 안 했고, 공부도 무조건 열심히 했다. 사춘기 때는 반항하고 소리 지르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지쳐서 침묵했다. 성인이 되고는 기절할 때까지 술을 퍼마시기도 했다.
무슨 짓을 해도 아버지의 이중성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로 인한 내 존재의 결핍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어 가슴 깊이 쌓여가는 분노가 가시질 않았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남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길 바랐다. 그저 공기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길 원했다. 아무도 내게 관심 갖지 말기를, 그래서 내가 보이기 싫은 모습은 아무도 못 봤으면 했다. 반면 내 안에는 튀고 싶은 욕망이 있다. 잘난 척하며 내 모습을 드러내고 누구나 나를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다. 그래서 글을 써도 스스로 만족하는 것보다 누군가 읽어주고 좋아해 주고 칭찬해주길 바랐다.
그 이중성이 싫다. 처음부터 끝까지 늘 한결같은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조금씩은 서로 충돌하는 면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나는 그걸 인정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이중성에 대해 터트리고 해소하지 못한 분노가 내게로 향해 그런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외면하고 싶고 불편하기만 하다.
결국 《기생충》은 며칠 뒤 남편과 같이 처음부터 ‘다시보기’를 했다. 남편은 여러모로 나와 다른 사람이다.
재수생이지만 명문대생을 연기하는 기우와 그 식구들이 위장 취업하는 과정에 불편하고 힘들어 몸부림쳤던 나와 달리 남편은 킬킬 웃으며 가볍게 영화를 봤다. 면전에서는 친절한 고용주였던 동익과 연교가 기택을 업신여기는 장면도, 온갖 혼란 끝에 결국 칼부림까지 일어나는 장면도 흥미롭게 봤다. 영화가 끝나고 기우가 ‘과연 그 집을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도 나는 회의적이었으나 남편은 ‘사업해서 잘하면 살 수 있지.’라고 심플하게 마무리했다.
그렇게 남편과 대화하며 영화를 보니 크게 힘들지 않았다. 혼자였으면 내내 우울했을 마음이 나와는 전혀 다른 사고와 태도를 가진 남편으로 인해 가볍게 넘어갔다.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문제가 이렇게 쉽게 해결되나 싶어 허탈했다. 영화가 끝나고 한참 지난 후, 가만히 혼자 생각해보니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국을 끓이다 소금을 너무 많이 넣었을 때, 물을 더 부어 간을 맞춘 것처럼 내 안의 불편한 분노가 희석된 것뿐이었다. 어쩌면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이 진한 감정을 희석시킬 ‘물’ 같은 ‘편안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이중적인 잣대가 존재한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어쩔 수 없이 흘러가는 상황도 있다. 빈부격차가 있고 서로 다른 사상이 존재한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충돌이 있고 불편한 상황이 발생한다. 《기생충》을 보며 내내 힘들었던 것은 나 스스로가 그런 불편함을 감당하지 못해서였다. 다음에 또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해야 하는, 내게는 특별히 조금 더 불편한 영화를 본다면, 어쩌면 조금쯤 다시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그동안 드라마 대본을 쓸 때 내 글을 읽은 사람들이 ‘갈등이 약하다.’ ‘쉽게 결말을 향한다.’라는 평을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나 보다. 영화에서 칼부림이 끝나고 기우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장면에서야 나는 한숨을 돌렸다. 어떤 방식으로든 결론이 나야 안심이 되는 거였다. ‘빨리감기’를 해서라도 결론을 얼른 보고 싶었고, 내 글도 그런 방식이었던 것은 아닐까.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20년 넘게 병석에 있었고 마지막 10여 년은 치매상태였다. 아버지는 요양원에 가시기 전까지도 내내 술을 찾았고, 지저분한 술주정은 강도와 빈도가 줄어들며 계속됐었다. 아버지의 이중성이라든지, 내 존재에 대한 결핍은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야 간신히 내 두려움과 분노를 마주 보게 되었다. 넘어가든 피해서 돌아가든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억지로 나아가게 채찍질하기보다는 ‘나’만이라도 ‘나’에게 용기를 주고 기다려주며 천천히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적어도 내 인생의 결말이 지하에 갇혀 언제 나갈지 모르는 상태로 훔친 음식을 먹으며 연명하거나, 전단을 돌리는 일로 돈을 벌어 수십억짜리 집을 사게 될 날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은 아니길….
《한국산문》 20년 6월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