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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공화국 (문예계간지 <표현>2021가을호_ 신아출판)    
글쓴이 : 김주선    21-10-05 13:13    조회 : 5,258
커피공화국/김주선


  도핑검사에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카페인은 선수들의 기분전환 차원을 넘어 실제로 경기에 도움을 준다는 보고가 있다. 국제반도핑기구에서 2004년에 카페인을 금지약물에서 제외했지만, 운동 전에 커피를 마신 사람이 운동 성과가 좋았다는 발표는 꾸준하게 나오고 있다. 요즘 스포츠를 보다 보면 선수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제공되고 쉬는 틈틈이 물 마시듯 하는 걸 볼 수가 있다. 스포츠 트레이너에 따르면 심폐지구력을 향상하여 근육의 힘을 지속해 준다고 하니 안 마실 선수가 있겠는가.

내가 커피 맛을 안건 고3 때였다. 입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쏟아지는 잠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약국을 찾아가 ‘잠 안 오는 약’을 좀 달라고 했을까. 실제로 각성작용을 하는 알약이 있기는 했었다. 그때 젊은 약국 종업원이 지나가는 말투로 커피라는 걸 처음 소개했다. 기도하는 승려들이 잠 쫓는 묘약으로 즐기는 것으로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자기 덕인 줄 알라길래 진짜로 믿었다. 물론 다방에서 파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른들만 마시는 음료라 생각했었고 다방에 갈 신분도 아니었다. 시장에서 인스턴트 분말 커피 한 병을 사와 부모 몰래 서랍에 숨겨두었다. 처음엔 설탕 둘 프림 둘 커피 한 티스푼을 넣어 마셨다.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것을 어른들만 먹었다니, 나도 빨리 어른이 되어 숨겨두고 마시지 않아도 되는 날을 고대했다. 쓰고 달콤한 매력 때문에 첫날은 밤을 꼴딱 새웠다. 도통 잠이 오질 않아 말똥말똥한 눈으로 원 없이 공부했다. 머리도 맑아지고 어찌나 두뇌가 팽글팽글 잘 도는지 암기력도 최상이었다. 몸도 가볍고 날렵했다. 커피의 치명적 유혹은 악마의 키스와 같다더니 그런 날이 반복되자 눈은 뜨고 있되 멍때리게 되고 집중력도 떨어졌다. 가슴은 뛰고 손발이 떨렸다. 잦은 이뇨작용으로 방광염까지 도지자 나는 커피를 끊었다.

성년이 된 후, 피로감이 누적되자 다시 커피를 입에 댔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깔끔하고 연한 아메리카노를 선호했다. 카페인 중독이라고 할 만큼 오히려 안 마시는 날은 편두통에 시달렸다. 머리가 아프면 구토가 났고 울렁증 때문에 또 카페인에 의존해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게다가 식전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입맛까지 빼앗아 홀쭉하게 살이 빠졌다. 저절로 다이어트까지 된 셈이었다.

모든 사람이 나처럼 카페인과 궁합이 잘 맞는 것은 아니다. 커피 한잔에 고질병인 편두통이 도지고 심장이 터질뻔하고 수전증으로 덜덜 떨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신경마비 증상과 복통까지 다양한 증세를 보였고 새벽 4시까지 잠이 안 와 미치고 환장하는지 알았다며 저주를 퍼붓는 이도 있었다. 나이가 반백이 넘는 지금까지 녹차조차 입에 못 댈 정도라고 하니 그들은 카페인과 상극인 게 분명하다. 나는 불면하고는 거리가 멀고 코까지 골며 잠은 잘 잔다.

언젠가 덕수궁 ‘궁중문화축전’에서 고종이 즐겨 마시던 ‘양탕국’을 무료시음한 적이 있었다.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 고종이 처음 커피 맛에 매료되어 대한제국의 커피 전도사가 되었다는 말이 참 슬프게 들렸다. 황망하게 통치권을 잃고도 남의 공사관 정원에 앉아 가배를 탐미할 정도로 그 맛에 반했다고 하니 마력의 음료인 것만은 사실인 모양이다.

분쇄한 원두를 사발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 잘 섞은 후 여과지로 걸러내는 드립커피인데 요즘 핸드드립과는 그 과정이 확연히 달라 보였다. 친절한 설명과 함께 바리스타들이 시범을 보였다. 고궁의 풍경을 감싼 푸르른 계절과 잘 어울리는 향기지만, 왠지 입이 썼다.

‘카피차’의 음역어인 가배차 혹은 가비차라 부르기도 했으며 훗날 조선의 저잣거리에서는 양탕국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귀족 음료라 서민들이 맛볼 기회는 그리 많지는 않았다. 손잡이 달린 잔도 아닌 막사발에 담아 마셨다고 하니 설렁탕 한 그릇 값보다 비싼 양탕국 한 사발의 인기는 대단했을 것이다.

당시 양탕국 한 사발이 녹용보다 더 좋은 보약이라고 할 만큼 그 효험을 인정한 고종이 인이 박일 정도로 좋아할 맛인지는 잘 모르겠다. 호기심에 줄을 서 나도 시음해 보긴 했으나 그 맛이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나라 잃은 슬픔에 커피를 탐미한 것일까. 고궁이나 이국의 분위기에서 마시는 매혹적인 가배차라면 국권을 빼앗긴 슬픔 따위는 잠시 잊었을 맛이려나?.

환궁 후에도 궁중 카페 정관헌에서 연회를 즐기며 가배를 즐겨 마셨다니 담장 밖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세상에 귀 기울이고 싶었음일까. 아니면 나약한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음일까. 백성을 나라 없는 곤궁한 삶으로 떨어지게 한 비운의 군주가 무얼 먹어도 쓴맛일 텐데, 커피 한잔에 자신의 삶을 위로했을 고종의 인간적인 외로움과 고독이 느껴지기는 했다.

나도 양탕국을 들고 정관헌 푸른 기둥에 기대어 보니 광화문 네거리에서 들리는 집회 부대의 찌렁찌렁한 구호가 너무나 가까이에서 들렸다. 늘 그랬지만 고즈넉한 궁궐과 소란스러운 광화문 거리는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카페인이 환각 성분도 아니고 기억을 또렷이 상기시키는 각성제에 가까워 오히려 고종이 처한 현실을 더 자각시켰을 것이다. 궁궐의 담장 너머 백성의 소리에 왕은 더 각성하고 성찰하였길 마음속으로 바랐다. 독살은 면했지만, 독을 탄 가배차를 마신 왕실 부자(父子)의 비극이 우리나라의 커피 역사의 시작이라는 것이 참 아이러니다.

요즘 대한민국은 커피 공화국이란 신조어가 생겼다. 이 조그만 나라가 중국보다 소비가 많다니 놀랍기는 하다. 매운 음식과 짠 음식을 즐기는 한국인에게 궁합이 잘 맞는 음료임이 틀림없다. 차를 즐겨 마시는 문화권의 사람들은 쉬고 싶을 때 차를 마시며 감미로운 분위기와 여유를 즐긴다. 여름날 그늘진 카페에 앉아 차 한잔으로 세월을 낚는 유럽인들을 보면 게을러 보이지만, 얼마나 여유로운가. 하지만 카페인은 일의 피치를 올리거나 업무의 능률을 끌어올리고자 할 때 마시는 경향이 있어 산업화와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화여대 앞에 스타벅스 1호점이 1999년에 생겼던가. 테이크아웃 커피가 유행처럼 번진 계기였고 점심을 먹고 난 후 커피를 들고 다니는 직장인들이 많았다. 어느 순간 우리나라 직장가는 커피문화가 자리 잡고 어디를 가나 커피 전문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게다가 커피믹스의 발명은 대한민국의 식탁 문화를 뒤흔드는 문화혁명처럼 느껴진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온몸에 힘이 나면서 파이팅이 넘치는 기운으로 경기에 임하는 선수나, 오후의 업무량을 소화해 내기 위해 내가 마시는 커피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쩌다 대한민국은 커피와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을까. 에너지음료인 양 들이켜는 커피보다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휴게실에서 잠시 쉬어도 좋으리라. 회사 내(內) 차 준비실에 들려 커피포트를 켜려다 말고 잠시 한 호흡 멈추어 본다. 열린 창문으로 솔솔 꽃향기가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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