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벽
올해 마지막 날이다.
직원이 퇴근한 진료실 안, 사방은 고요하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스며들어오는 불빛이 살갑다. 새해를 맞이하는 희망의 빛줄기 같다. 조용히 일어선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만의 연말 의식을 치른다.
진료실 벽에서 달력을 내린다.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이 처연해 보인다. 마저 뜯어낸다. 위 철심 틈에는 열두 개의 종이 잔해들이 빼곡히 박혀있다. 지난 한 해 동안 진료실에서 있었던 갖가지 사연들이 압축되어 있으리라. 철심의 틈을 벌린다. 어느 아낙네가 남편의 밥상에 올리려 고등어의 뱃속을 정성스레 후벼내는 듯, 철심을 정리한다. 그렇게 '2021'이라는 숫자는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달력이 있던 자리에는 직사각형의 새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가장자리를 따라 거무스레한 경계선이 생겨있다. 분명 멀쩡해 보이던 주변의 벽까지 추레해 보인다. 십 년 된 벽지 곳곳에는 얼룩이 묻어있다. 문득, 세월의 때를 올린 벽면은 지금의 ‘나’이고, 하얀 민낯을 드러낸 네모난 벽면은 십 년 전의 ‘나’라는 생각이 든다. 막 태어난 아이의 뽀얀 얼굴을 시샘이라도 하듯,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경계선을 넘어 하얀 벽면으로 들어간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경계선 너머 나에게 말을 건넨다.
지금 나를 빤히 쳐다보는 저 의사 선생, 아니 너. 많이 변했네. 정수리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희멀건 두피 면적이 점점 넓어지고 있어. 얼굴에는 내 천(川) 자, 여덟 팔(八) 자가 난무하고. 피부는 또 어때. 진료실 벽처럼 얼룩덜룩해. 어디 외모뿐이겠어. 요즘 너는 누구를 대하든지 일단 마음의 벽을 치는 것 같아. 성심껏 대해줘도 뒤통수치는 환자를 여럿 겪었으니 그렇게 변해가는 거겠지. 그런 네가 안타까워.
진료실을 한번 둘러보자고. 저기 침대 옆의 푹 파인 자국, 저건 거동이 불편한 팔십 대 노인이 일어서려고 용을 쓰다가 생긴 손톱자국이야. 그때 너는 대기 환자들 때문에 빨리 일어나라고 눈치를 주더군. 노인이 미안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는데도 말이야. 그건 네가 노인의 심장을 손톱으로 긁는 거였어. 나는 어떠냐고? 저쪽 천장 밑에 마치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 같은 얼룩이 보이지? 그건 눈물과 땀방울이 뒤엉겨서 흘러내린 거야. 눈물의 주인공은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말기 암 상태의 노인이었어. 그는 마지막으로 발기된 자기의 남성을 보고 싶다고 했어. 나는 차마 노인의 마지막 소원을 저버릴 수 없었고, 최선을 다했지. 노인은 삶을 다시 얻은 것 같이 기뻐하며 눈시울을 적셨고, 내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송 맺혔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너는 변하기 시작하더군. 네 앞의 벽을 봐. 저기 있는 거미줄 흔적, 그 거미는 참 부지런하기도 해. 너의 마음에 미움과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항상 저 자리에 줄을 치더군. 그리고는 너를 낚아채 그물에 꽁꽁 감아버리는 거야. 하지만 그때마다 너는 용케도 몸부림을 치며 줄을 걷어내더구나.
그런데 말이야 진료실의 책상에 벽이 하나 더 생겼어. 아크릴판으로 만든 투명한 벽이야. 코로나 사태 때문이지. 이제 환자와 너 사이에는 마스크와 함께 삼중의 벽이 생긴 거야.
오늘 온 이십 대 남자가 생각나네. 보자마자 취업 신체검사에서 혈뇨가 발견됐다면서 문제가 없다는 의사소견서가 필요하다고 하더구먼. 부탁이 아니라 명령조로. 너는 원인을 알기 위해 몇 가지 검사가 필요하고, 이상이 없으면 써준다고 했었지. 의사로서 당연한 대답이지. 얼마간 두 사람의 실랑이가 이어졌어. 그 상황은 실력이 비슷한 선수들 간에 벌어지는 탁구경기 같았어. 청년은 공격 전형, 너는 수비 전형 선수로 말이야. 아크릴 벽을 사이에 두고 지루한 랠리가 계속됐었지. 급기야 화가 난 청년이 너를 한쪽 구석에 몰아 놓고 반대쪽으로 강 스매싱을 날리더군.
“아니, 종이 쪼가리 하나 써서 주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래요. 완전히 사기꾼 아니야! 돈만 밝히는…”
“뭐요? 사기꾼!…”
깜짝 놀란 네가 받아낸 공은 그만 아크릴 벽에 걸리고 말았지. 공의 반발이 얼마나 셌던지 아크릴 벽에는 커다란 얼룩이 남았어. 너는 결국 ‘이상 없다’라는 의사소견서를 써주고 환자를 보내더군.
너는 한동안 분을 삭이지 못했어. 아들 뻘인 사람에게 당한 모욕 때문만은 아닐 거야. 의사의 권리인 의사소견서를 종이 쪼가리 취급하고, 의사 환자 간에 신뢰가 완전히 무너진 세태에 허탈한 거겠지. 그때 너는 투명한 벽에 큰 돋보기라도 달고 싶은 심정이었을 거야. 서로의 마음을 환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말이야. 그런데 내년에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함께 기원하자.
하얀 벽면 위에 새 달력을 건다. 그전 달력보다 크기가 작다. 하얀 액자 틀이 달력 주위에 생긴다. 그 틀도 또 한 해가 지나면 주위의 벽에 동화될 것이다. 그러면 달력 뒤에 숨은 ‘나’는 더욱 작아지겠지. 요즈음 나는 꼭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 건 아니지 싶다. 하릴없이 배회하며 자신의 배설물로 영역 표시를 하는 수사자처럼, 나만의 벽을 두르고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왜일까. 벽 밖에서 다가오는 반목과 질시를 회피하고 싶다는 자기방어 때문일까. 그렇게 하더라도 적어도 나는 어릴 적 꿈꾸던 길을 가고 있다는 자기만족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나만의 내가 아니다. 누구의 남편이고, 누구의 아빠이다. 진료실에서는 의사로서 나다.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 내가 아는 미운 이 고운 이…, 그들 모두가 있어 나는 존재한다.
사방이 벽이다. 수많은 얼굴들이 더러는 기쁨으로, 더러는 슬픔으로 진료실 벽 속에 공존한다. 터지고 갈라진 벽면의 얼룩에는 이 공간을 거쳐 간 수많은 이들의 애환이 담겨있다. 아니다. 실제 벽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내가 만들어낸 벽이고, 마음의 장벽일 뿐이라 되뇌어본다. 벽을 사이에 두고 환자와 나를 가를 뿐, 결국 진료실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서로 부대끼고, 호흡하고, 상처를 치유하지 않는가. 벽이 완전히 투명해지는 날, 그 너머에 펼쳐진 햇살 가득한 초원 위를 그들과 함께 걸어가리라.
진료실을 나선다. 뒤돌아보니 오늘 아크릴 벽에 묻었던 얼룩이 마음에 걸린다. 그 얼룩 외에도 무수히 많은 얼룩이 흩어져 있다. 말끔히 닦아낸다. 투명해진 벽이 말해주고 있다. 너는 아직 가망이 있다고.
≪한국산문≫ 2022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