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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가을에 빠지다    
글쓴이 : 진연후    22-11-01 13:29    조회 : 3,760

다시, 가을에 빠지다

                                                  진연후

 

9월 중순 어느 날,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상가 2층 사무실에서 면접을 보기로 했다. 상가 입구까지 늘어선 은행나무가 낯가림 심한 내게 먼저 아는 척을 한다. 2층 강의실에서 창으로 내다본 하늘은 여유로웠고 그 순간 나는 출근을 결정지어 버렸다.

오후 2시 출근 시간, 한낮의 은행나무 길은 걸음을 멈추게 하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게 했다. 쉬는 시간이면 창가에서 지나가는 비와 눈, 그리고 구름과 바람에 눈과 귀를 열어두고 마음을 토닥이곤 했다. 아파트 재건축으로 그곳을 떠나올 무렵에는 은행나무와의 이별이 짝사랑을 끝내는 것처럼 서운하고 쓸쓸했다.

가끔 생각했다. 그때가 가을이 아니었으면 내 선택이 달랐을까? 은행나무 잎이 그렇게 유혹적으로 강렬하지 않고, 하늘이 그렇게 펼쳐지지 않았더라면. 생각해보면 출근 요일도 월급도 소개받았던 것과 달랐는데도 왜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았을까? 아파트 단지도 그 당시 이미 곧 재건축을 해야 할 것 같았고, 상가는 무척이나 을씨년스러워서 얼마나 다니게 될까 걱정될 정도였는데.

 

보통 직업을 구할 때 사람들은 연봉, 위치(퇴근시 소요되는 거리), 연봉 외의 대우, 적성 등을 생각할 것이다. 집을 구할 때도 크기, 가격, 주변 시설, 위치, 교통 등을 고려할 테고, 결혼할 때는? 외모, 성격, 경제 능력, 유머 감각 그 정도를 평가 목록에 넣지 않을까? 그런데 정말 사람들은 그런 판단 기준에 따라 선택을 할까? 그들은 얼마나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후회하지 않을 신중한 선택을 할까? 어쩌면 순간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후로 오랫동안 잘 살았다는 마무리를 원하는 것일지도.

영화관에 가서 고심 끝에 영화를 고르고는 입구를 잘못 들어가(안내하는 분의 실수도 한몫) 생뚱맞은 영화를 보고 나온 적이 있다. 잘못 들어간 걸 한참 지나서 알게 되었는데 중간에 일어나 나오기도 어색해서 그냥 끝까지 다 보고 나왔다. 보려고 했던 영화도 본 영화도 지금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에 없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추억(?)만 남았다.

 

우리는 엄청 신중하게 무언가를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도 있다. 궤도의 과학 허세라는 책에서, 내가 선택한 줄 알았는데 이미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서 무의식적으로 결정하는 것들이 많다는 걸 읽은 적이 있다. 예를 들면, 영화관에서 일반적인 팝콘 라지 사이즈의 가격은 5000원이고 미디엄 사이즈 가격은 4500원 일 때, 크기는 눈에 띄게 차이가 나는데 가격이 500원 차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얼 선택할까? 다 먹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매번 큰 걸 선택하는 이들,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가격이 크기에 비례해서 일정하게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는 것에 어쩌면 선택을 조종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되었더라도 내가 만족하면 된 것 아니냐고, 그러므로 자신은 나름 합리적인, 최고의 선택을 했다고 믿는다면 그 또한 기준이 될 수도 있겠다.

결과가 좋을 때는 온전히 자신의 의지만으로 결정한 것처럼 당당하고, 결과가 흡족하지 않을 때는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설명이 장황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딱히 그런 선택의 기회도 많지 않았고, 그럴 때 비교 대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다소 엉뚱한 기준으로 선택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후로 오랫동안 잘(?) 지냈다. 때로는 버겁기도 하고 두려울 때도 있었지만 깔깔대는 웃음 속에 파묻힐 때도 많았고 기분 좋은 두근거림의 시간도 수없이 누렸다.

23년 전 첫 만남, 첫 느낌을 돌아보니 나무와 하늘이 선택 기준이어서 참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건강상 이유로 몇 달 동안 한 발만 걸치고 있는 내게 지인들은 명쾌한 기준을 제시하며 답답해했다. 나는 여전히 다소 엉뚱한 기준으로 즉흥적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크게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가을이어서 시작된 만남, 마음에 은행잎 하나쯤 남아 있을 때 마무리를 해본다. 늘 아쉬움은 남게 마련이지만 그것도 내 몫이다. 괜찮다. 가을이니까.

 

 

한국산문. 202210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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