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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의 계절    
글쓴이 : 박지니    22-11-24 16:53    조회 : 3,094

낭만의 계절

 

두툼한 카디건에 손이 가는 일요일 아침, 목이 올라오는 니트를 받쳐 입고 성당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노오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뒤로 하고 대문을 나서니 건너편 담 너머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뭇잎 색깔이 빛을 바래고 겨자색과 적갈색 낙엽이 길 가장자리로 쌓여가는 가을, 비가 그친 아침이면 가을의 뉴욕을 떠올리곤 한다.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에 갔을 때 센트럴파크를 빙 둘러 걸은 적이 있다. 이슬 머금고 눅눅해진 낙엽과 빛바랜 잔디 위를 걸으며 문득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다른 손은 연인에게 맡긴 채 그곳을 함께 걷고 싶었다. 십여 년의 시간 동안 감성이 메마른 것일까.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하는 달콤한 상상은 더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더위가 지나고 찬바람이 불어올 즈음, 한해가 또 저물어 감을 느끼며 떠올리는, ‘그랬었지. 그런 적도 있었지.’ 정도의 추억 조각일 뿐.

푸르지도 흐리지도 않은 하늘과 회색 담 너머로 단풍든 나무들이 빚어낸 조화로움에 눈을 두고 걷다가 철 대문 올라가는 소리에 걸음을 멈춘다. 차 한 대가 천천히 나와 앞을 지나는 동안 빌라 입구에 눈길을 준다. 화단의 초록색 잎들 사이를 채운 빨간 시클라멘이 소담스러운 것이 라임스톤 외벽과 무척이나 어울려 마음이 술렁인다. 마치 외국의 고풍스러운 주택가를 거닐 듯, 유명한 사진작가의 작품 속 모델이라도 된 양 발걸음을 옮기지만, 몇 걸음 못 가고 거적때기를 걸친 회벽 앞에서 멈추고 만다.

올통볼통한 회벽을 덮은 마른 나뭇가지와 그 사이로 아직 낙하하지 않은 마른 잎새를 바라보고 있자니 불쑥 눈앞에 테이크아웃 컵이 나타난다. Good morning. 나지막한 목소리. 팔짱을 풀고 컵을 받아드는 내 얼굴엔 미소가 맺혀 있을 터. 말없이 내가 향하고 있는 담벼락을 바라보며 어깨를 감싸오는 손길에 슬쩍 그에게 머리를 기댄다. 아직은 공기가 머금은 서늘함이 달갑다고 생각했건만, 사실은 조금 추웠던 걸까? 손에 쥔 커피의 온기와 함께 따스함이 마음까지 채워주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좋다.” 하고 나직한 탄성을 뱉어내니 옆에서는 짧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스스러운 마음에 입을 삐죽이고는 입가에 컵을 가져간다. 컵 안 가득한 커피 내음에 속으로 좋다.’를 되뇌며 발길을 뗀다.

멀리서 볼 때는 그저 주황색인 것 같던 나뭇잎은 가까이에서 보니 겉쪽에 붉은 테두리를 두른 것들이 있는가 하면, 붉은 물감을 떨어뜨린 양 안쪽부터 색이 변하기 시작한 것들도 있다. 아직도 파릇파릇하게 선명한 녹색을 띠고 있는 잎사귀가 있는가 하면 초록 잎 지척에 벌써 빛이 바래고 벌레까지 먹은 녀석도 있다. 각기 다른 색감을 뽐내는 나뭇잎들이 어우러져 가을의 운치를 자아내고 우리는 함께 한곳을 바라보고 있다. 살아온 시간이 다른 너와 내가 만나 지금은 같은 것을 바라보고 함께 길을 걷는 것. 담쟁이 달린 회벽이 끝나고 담장 안 나무에서 떨어진 울긋불긋한 낙엽이 쌓여 있는 돌담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는다.

겨울이 다가올수록 나무들은 옷을 벗기 시작한다. 이제 더이상 타오르는 태양에서 숨겨줄 그림자를 만들어주지 않아도 되는 것을, 그들도 아는가보다. 나무그늘 아래에서 더위를 피하는 시절은 지나고 마음의 온기로 서로를 보듬어주는 계절인 것이다. 싸늘한 공기에 차가워진 숨을 데워줄 차 한 잔, 동면에 들어가려는 마음을 일깨워줄 말 한마디, 소소하지만 사랑이 묻어나는 표현들.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니 어느새 성당 앞. “추워졌는데 좀 따뜻하게 입고 나오지.” 마음 담긴 말에 딱 좋은 정도인 걸요.”하고 답을 건넨다. 마주치는 사람들과 서로의 안부를 묻고 나서 자리에 앉아 마지막으로 십자고상 위의 예수님과 눈을 맞추면, 어쩐지 좋냐, 물으시는 것 같아 배시시 웃는다.

비 내린 다음날의 쓸쓸한 가을풍경은 감성을 깨우고 이맘 때 갔던 여행의 기억이 추억과 함께 설렘을 부른다. 성당을 오가는 10분 거리, 나는 꿈을 꾼다.

 

문예바다, 2022.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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