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혜선
김장 하세요? 얼마나 하세요? 20kg짜리 4, 7, 10박스 등 각기 다른 답이 돌아온다. 부녀회, 성당, 절 등 각기 다른 곳에서 판매하는 절임 배추를 사서 하는 김장이 겨울 채비 일상의 모습이 되어 가나 보다. 어디 배추가 맛있다. 우리 아파트에 쪽지가 붙었다, 한 박스에 갓, 쪽파 한 단씩 넣어라. 는 둥 김장 정보도 오간다. 시골 시댁이나 친정에 가서 하고 얻어 온다는 말보다 흔하다.
마트에 들어가다 보니 입구에 양념을 판다는 안내 문구 아래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붉은 김치 사진이 있는 박스가 쌓여있다. 아래 박스에 있는 절임 배추를 사고 20킬로 한 박스 당 4킬로들이 몇 통의 양념을 넣으면 맛있다는 친절한 지침대로 그 양념을 사라는 홍보를 하고 있다. 보면서도 이해가 안 되어 한참을 서 있었다. 그 둘을 분량대로 사다 버무리면 사먹는 김치와 무엇이 다를까. 그렇다면 왜 성가시게 담글까.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걸까. 신제품처럼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게 될까. 작고 볼품없는 파를 다듬은 손을 가져보지 않은 듯 잘 가꾸어진 손톱을 지닌 젊은 엄마는 절임 배추와 계량해 놓은 양념을 사다 버무리는 행위를 ‘김장 체험’이라고 했다. 마트 야채 판매대를 지나는데 다듬어져 깨끗한 미나리, 쪽파, 갓 등이 더 이상 세척이 필요 없을 듯한 자태로 다진 마늘과 함께 놓여 있다. 그 앞에 중년이 조금 안 되어 보이고 직장 여성인 듯한 여자가 얼마나 살지 연구라도 하는 듯 들여다보고 있다.
맥이 빠져 돌아왔다. 답답해 나간 베란다 구석에 5년 전쯤 담아 놓은 젓갈 항아리가 보인다. 뚜껑을 열어 보니 끓여 받치지 않아도 될 만큼 삭았는지 건더기가 풀어져 형체도 보이지 않는다. 잡 생선으로 만들었지만 비린 냄새는 나지 않는다. 냄새가 아니라 향기마저 맡아지는 젓갈에 꽁해졌던 마음이 다소 풀어진다. 옆에 서걱일 듯 굵은 소금이 간간히 보이는 작은 항아리들 속 젓갈은 1~2년 더 묵어야 한다.
“첫 김치 축하해 주세요.” 라디오 축하 코너의 사연이다. 레시피대로 했으니 보기는 좋단다. 디제이는 보기 좋은 떡이 먹기 좋은 법이니 맛있을 거라고, 축하할 만하다고 격려한다. 나의 첫 김치는 엄마가 담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본만큼의 배추를 산 데서 실패를 예감했다. 겨울에 한 결혼이라 봄이 되니 김치가 동이 났다. 김치국, 김치전 등을 좋아하는데 김치가 없는 건 상상해 보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작은 집 다용도실을 꽉 채우고도 넘는 배추 여섯 포기를 각각 반으로 갈라놓았으나 절일 그릇은 물론 담을 통도 없었다. 소금을 자꾸 넣어도 숨이 죽지 않아 엄마를 청했다. 진정을 하고 숨을 돌리고 있는데 시아버지가 오셨다. 김치 때문에 엄마를 오시라 했다 하니 잘 했다 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김치 교육시켜 보내지 못해 못마땅하단 말씀 대신 용돈을 주고 가신 시아버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방문이었다. 엄마의 면을 세워드리고 싶고 살림 잘하는 며느리가 되고 싶어 다음 해부터 김장은 물론 된장도 담고 있다.
남편이 소원이라며 주말농장 겸 마련한 땅이 있다. 변변한 연장도 없이 둘이 손발로 개간한 지 몇 해나 지났을까 여름이 채 지나지 않은 8월 하순 무와 배추를 심자고 했다. 체험삼아서 한다는 김장을 해온 30년이 탈색될 만한 발언이었다. 누군가 심고 키워야 생기는 걸 몰랐다. 마트에서 사지 않고 재래시장에서 사는 것도 큰 인심 쓰,듯 해온 나로서는 더위가 가시지 않은 때 심는 모종은 생소했다.
작은 풀 만한 모종에서 무와 배추 모양을 발견한 건 새로운 체험이다. 쪼그리고 앉아 주변을 빙 돌아가며 들쭉날쭉 심어놓은 작은 배추들은 자라는 크기가 제멋대로다. 내 멋대로 심어 들쭉날쭉 자리 잡은 배추를 김장에 쓸 만큼 크게 키우려면 공간을 띄워져야 한다고 솎으란다. 솎으라고? 바투 자란 것들 사이를 벌려주느라 주변에 치여 작은 걸로 뽑는다. 으슬으슬한 날씨에 나가면 국거리용으로 못난 놈을 고른다. 겉절이를 위해서는 제일 큰 걸 뽑는다. 구색 갖추기에 좋고 보기 좋으라고 쪽파도 심었다. 키가 커지고 한 주일이 다르게 통통해지는 모습은 남편의 취지에는 맞다. 주말 농장을 지나다니며 한가하게 거니는 풍경에 대해 목가적인 생각을 했던 과거는 현실이 되자 나를 바짝 죄었다.
때가 되었다는 건 추위에 오그라드는 손이 알아챈다. 기온이 영하 2도로 떨어지면 무·배추가 언다고 했다. 일기예보에 놀라 밤에 달려가 자동차 불빛에 의지해 수확하기를 몇 번이다. 용케 시장에서 파는 크기로 자란 배추를 뽑을라치면 벌레 먹은 부분이 더 많다. 낫으로 밑둥을 치며 다듬는 모습은 상상에 없는 장면이다. 비닐에 몇 포기씩 나누어 절여 아파트로 가져온다. 절여지는 배추 외 뽑아 온 것들을 부려놓은 집은 거실이며 화장실, 주방 할 것 없이 북새통이 되기 일쑤다. 북새통 속에서 벌레니 흙이니 우거지와 시레기가 지천이다. 반찬 중 특히 김치는 ‘노동의 반찬’이라고 한다. 직접 담는 김장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 체험치고 너무 오래 하고 있어도 이것이 생활이고 또한 나이다.
반조리용 밀키트(meal kit) 음식이 요리 배울 여유 없고 바쁘고 시간 없는 현대인들의 식탁을 점령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집에 초대받아 식사 대접을 받으면 맛있다는 인사로 “어머 사먹는 음식 같아요.”라 하지만 외국에서 음식점 맛에 대한 인사말은 “집에서 먹는 음식 같다”고 한단다. 고향이나 집이 그리운 사람에게 ‘집밥’ 해 주는 것이 따듯한 배려가 되고 있는 요즘이다. 잘 익은 김장 김치 하나면 열 손님에게 밀키트 음식을 내놓은들 무슨 흉이 되랴? 김장이 끝나고 “짜장면 부를까?” 하는 남편에게 크게 손을 내저으며 겉절이와 우거지로 끓인 배추국을 내놓는 손끝이 붉고 따뜻하다. 중화요리집 식탁에 올려진 고춧가루로 보아 짜장면에 김치도 잘 어울리겠으나.
<<아리수에 새기다>> 수필사랑 양평, 아리수 강가에서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