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이망우(樂以忘憂)
봉혜선
집에서 해가 떠오르는 곳이자 희망을 가리키는 동쪽 가장 가까이 망우(忘憂)산이 자리하고 있다. ‘학문을 연구할 때는 식사까지도 잊고, 연구하여 명백함을 얻었을 때는 즐거워 모든 걱정을 잊어버린다(발분망식낙이망우發憤忘食 樂以忘憂 )’. 논어 술이편(述而篇) 대목으로 ‘망우’의 유래이다.
역사 속 망우리의 이야기를 보자. 왕이 된 이성계가 지금의 동구릉 자리를 탐내자 주인이던 도병마사 남재가 신하된 도리로 양보했다. 왕이 불망기를 써 주자 남재 선생이 근심을 잊었다는 설이다. 또 다른 설이 있다.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검암산이 있는 지금의 건원릉 자리에 음택(陰宅)을 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망우리고개에 이르러 “이제야 근심을 잊겠노라”라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
동네 도서관에서 중국어를 배울 때 중국어 강사는 한국말이 어눌한 한(漢)족이었다. 서로 서툰 언어를 배우며 몇 년을 보내는 동안 우리 동네, 특히 망우리에 터를 잡게 된 사연을 들었다. 서울에 와 중국어로 된 지도를 보던 중 뜻이 좋아 ‘찍은’ 동네였다는 것이다. 나중에야 근심이 끝나기는 죽어서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미 한국인으로 귀화했고 우리같이 좋은 사람을 만나 잘 살고 있다며 근심을 푼 강사는 아들을 데려와 진짜 한국인이 되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은 서울 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에 걸쳐 넓게 자리하고 있다. 미아리 공동묘지가 가득 찰 것을 대비해 일제 강점기 때 공동묘지로 조성해 사용했다. 1997년 공원화 사업을 단행해 꽉 찬 묘들을 이전했다. 예술가들의 묘지를 중심으로 남은 7,500여 기로 ‘망우리공원’으로 개칭했다. 지금은 연보비(捐補碑)를 입구에 설치해 역사가 숨 쉬는 장소로, 샛길을 조성해 걷고 싶은 길을 가진 역사문화공원으로 거듭나고 있다.
몇 해 전 10여 명이 뜻을 모아 잠들어 있는 문인들을 나누어 조사하고 탐방에 나섰다. ‘세모시 옥색치마~’, 「그네」를 작사한 여성 계몽가 김말봉 작가의 묘는 입구 안내센터 가까이 있다. 김말봉을 조사해온 사람은 묘지에 올릴 떡을 직접 쪄왔다. 시인 박인환 묘 앞, 담당자가 추모비로 세워진 노래가 된 시 「목마와 숙녀」를 틀었다. 시인이자 독립지사 한용운은 죽어서도 기림을 받는 듯 묘 터가 넓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필지 「박문」을 발간한 최신복은 방정환 선생과의 특별한 인연을 죽어서도 잇겠다고 방 선생 묘 앞에 부모 묘를 이전해 왔으며 자신은 그 아래 문지기인 듯 묘석도 없이 자리하고 있다. 그를 조사한 이는 묘가 작다고 서러워했다.
내가 조사를 담당한 작가는 「백치 아다다」로 알려진 계용묵이다. 안내판을 보고 묘를 찾 으니 내리닫이 길이다. 묘는 남향받이고 잡풀이 적어 다른 묘소에 비해 말끔하다. 후손이 돌보고 있는 묘소라는 정보를 가져온 문우의 말이다. 유명을 달리한 예술인들에 대해 쏟는 나라의 관심은 기대에 못 미치는가 보다. 가져간 술을 부어 올리고 절을 했다.
살아있는 예술인에 대한 배려와 지원을 호소하는 소식을 접하며 험난한 길 가기를 자청하고 있는 예술가의 삶을 생각했다. 광화문 앞 서점에 걸린, 동네 가까운 서울 의료원 회벽을 장식한 문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을 걷고 살 만한 세상이라 여기게 하며 위로를 건네고 있는지 모른단 말인가. ‘예술은 쓸모없음으로 쓸모 있다’고 설파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이중섭, 차중락, 오세창, 안창호, 지석영, 유관순, 조봉암, 이기붕 등 화가, 예술가, 학자, 극작가, 독립 운동가들의 묘가 어울려 있어 죽어서는 살아있을 때만큼 외롭거나 서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다소 진정할 수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김상용 묘지는 「남으로 창을 내겠소」 시비와 함께 남쪽을 향해 있다. 명실상부 프랑스 페르 라셰즈 묘지에 비견될 만한 예술가와 애국자의 공원이 되고 있다.
샛길에 새로 설치한 글판이 공원에 낭만을 더해 가고 있다. 글판에는 “한 잔의 술과 한 편의 시는 하루의 망우이다” 라는 구절이 적혀있다. ‘닭 잡고 술 마시는 것은 봄·가을의 망우요’에서 이어지는 남치관(?~1742)의 싯구다. 시는 ‘나도 여러 공의 뒤를 따르고 있으니 망우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이어진다. 가까이에 있지만 무서울 거라 여기던 장소였다. 공원이 된 망우 묘지에 죽어서도 꺼지지 않은 문향이 배어 있다고 여겨서인지 한결 친숙하게 느껴진다.
공원이 된 망우산 동쪽 너머 아차산이 있는 중곡동은 남편이 결혼 전까지 살았던 동네다. 근처에는 자주 올랐다는, 너른 품을 지닌 용마산이 있다. 용마산, 아차산, 망우산으로 이어지는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이야기는 지명 ‘망우’에 얽힌 또 다른 유래다. 이어진 산들을 건너 이룬 살림이 남편의 낙이이며 망우이길 바란다. 동쪽에서 매일 희망의 태양이 떠오듯 근심을 잊을 수 있고 즐거울 수 있다면 더 무엇을 바라랴.
문인의 ‘무덤까지’ 품고 묘지에서 공원으로, 역사문화공원으로 거듭 변신하고 있는 망우공원에 서 있다. 삶을 멈추고 안식을 얻은 이곳 망우공원이 나의 문인을 향한 ‘요람’의 산책길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월간문학>>65. 20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