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저 사람 좋아해?
서울로 전학을 와서 전세로 살다가 2년 후에 아버지가 아예 집을 사서 이사했다. 전농동 시장 안에 있는, 가게가 딸린 집이다. 안채는 살림을 할 수 있는 방이 세 개 있었고, 시장 통 쪽으로 2개의 가게가 있었다. 대문이 시장 통 쪽으로 나 있어 집 출입을 하면서 가게를 하는 사람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우리 집 대문의 왼쪽에는 주방 용품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거기에는 양은 냄비가 많았기에 우리는 ‘양은 가게’라고 불렀다.
가게 주인은 40대 중반의 홀아비였다. 체격은 호리호리하게 말랐고 키는 큰 편이었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붙임성이 좋은 성격이라 우리 형제 그리고 여동생과 바로 친해졌다. 집 밖으로 나가거나 밖에서 들어올 때 눈이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약 1년 후에는 어머니도 서울로 올라왔다. 14살에 시집와서 30년 이상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했던 농사일과 종가댁 맏며느리의 역할을 큰형수에게 넘기고 우리 형제들을 뒷바라지하는 서울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물론 수시로 고향을 왔다 갔다 하면서 시골집도 살피고 먹거리를 실어 날랐다.
붙임성이 좋은 양은 가게 아저씨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했다. 천성이 착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을 테니 어머니 역시 우리 4남매처럼 양은 가게 아저씨와 금방 이웃 사촌이 되었다. 어머니는 시골에 갔다 올 때 가져오는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을 찌면 아저씨에게도 반드시 나누어 주었다. 시골에서 그런 음식들을 삶으면 친척을 비롯한 이웃들과 당연히 나누어 먹는 것처럼.
그런데 서울에서 어머니의 그러한 행동이 아버지 눈에는 영 못마땅하게 보였는가 보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의 어느 날도 예전처럼 시골에서 가져온 옥수수를 쪄서 양은 가게 아저씨에게도 갖다 주라고 하셨다. 여동생이 “네”라고 대답하면서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며 말했다.
“당신 저 사람 좋아해?”
어머니는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아버지의 이야기에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너무 어이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버지는 또 쏘아붙였다.
“왜 먹을 거만 있으면 그 사람에게 갖다 주는 거야. 그 홀아비가 마음에 들어”
말도 안 되는 애먼 소리를 들었으나 어머니는 자식들 앞이라 그런지 일절 대꾸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큰 소리가 나는 걸 들었는지 양은 가게 아저씨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아저씨에게 “안 사람과 어떤 사이냐?”라고 다그쳤다.
아저씨는 화를 내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오해를 받는 게 어이없다”
“아주머니에게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천벌을 받는다. 아주머니는 결코 의심받을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후 아버지와 양은 가게 아저씨의 입씨름이 이어졌으며, 종국에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낮아지며 이날의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번 일은 ‘방귀 뀐 분이 성낸 것이고, 적반하장이란 것을’. 아버지는 거의 평생 어머니 이외에 다른 여자를 가까이했었다. 딴 살림을 차렸다가 헤어졌던 여자들이 손가락을 셀 정도도 여럿이었다. 그런데 희한한 건 잘못한 아버지는 큰소리를 치고 잘못이 없는 어머니가 오히려 할 말을 안 했다는 사실이다. 지금 사람들 같으면 언감생심 꿈이라도 꿀 수 있는 이야기일까?
그런 소동이 있은 지 얼마 후에 우리 집 가게 중 한 곳에서 장사하던 부부가 가게를 내놓겠다고 했다. 남자는 허우대가 멀쩡하고 S대를 나왔다고 했으나 생존을 위한 활동에서는 젬병이었다. 여자가 장사를 주도했지만 그렇게 신통치는 않았다. 결국 부부는 장사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가기로 했다.
그때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당신이 직접 가게를 운영해보겠다고 했다. ‘오기로 그러는 건지 또는 아버지에게 시위하는 건지’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어찌하였든 어머니는 가게를 열었다. 파는 물건은 건어물을 택했다. 미역, 김, 파래김, 멸치, 북어, 마른오징어 등으로 기본적인 구색을 갖추었다. 어머니가 양은 가게 바로 옆에서 건어물 가게를 했다. 양은 가게 아저씨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버지는 어머니가 옥수수나 감자, 고구마를 갖다주는 것에 대해 더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30년 이상 채소나 곡식을 키우고 거두는 밭일을 했다. 그러니 농사에 관한 한 누구한테 빠지지 않는 전문가다. 하지만 경험이 전혀 없었던 장사는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양은 가게 아저씨처럼 친절하고 나긋나긋한 성격도 아니다. 그렇다고 손님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며 물건을 팔 수 있는 수완도 없었으니. 결국 가게를 시작한 지 6개월이 조금 지날 즈음 더는 가게를 하지 못하겠다고 손들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듯이’ 어머니의 경우 농사라면 모를까 ‘가게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라는 걸 느꼈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한 분은 22년 전에, 한 분은 17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지금도 두 분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어머니! 하늘에서는 아버지가 속 썩이지 않죠?
<한국산문 2022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