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쭐
윤기정
신조어 유행은 오늘날만의 특성은 아니나, 인터넷과 SNS라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 전보다 활발한 것 같기는 하다. 신조어는 젊은이의, 젊은이에 의한, 젊은이를 위한 언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새로운 문물과 새로운 사회 현상을 한정된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새로운 말이 필요할 것이다.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은 젊은이들의 특징이다. 새로운 말을 만들고 사용하고 즐기는 계층 또한 젊은이들이다. 인터넷과 SNS로 소통하고 정보를 얻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신조어를 하나의 놀이 문화 정도로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신조어를 잘 알아야 꼰대를 면하는 양 부지런히 신조어를 익히고 배워서 자랑하는 나이 든 축도 있기는 하다. 나도 인터넷이나 신문, 잡지의 신조어 특집란을 기웃거린 적이 있었다. 한두 개 기억해두었다가 또래 친구들 만나면 폼을 잡아도 보았지만 노인에게 어울리는 일은 아니었다. 잠시 웃고 말 일이지 일상어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젊은이들 말을 못 알아들으면 어떤가? 신조어는 은어의 역할도 일정 부분 있는 게 아니던가. 어른들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주고받는 은밀한 쾌감을 즐기던 때가 누구든 젊었을 때 한두 번은 있었으리라.
요즘은 신조어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모른다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생활에 불편함도 없다. 몸에 맞는 옷을 입어야 맵시가 나듯 신조어는 젊은이들이의 유쾌한 웃음소리와 어울리는 말이라는 생각에서다. 신조어 사용을 젊음의 상징인 양 행세하는 ‘꼰대’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되기도 한다. 신조어를 모두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맥락으로 눈치로 어느 정도는 알아듣는다. 실시간 문자로 감정을 주고받는 데 사용되는 신조어는 그 환경에 맞게 간결하면서도 의미가 떠오르게 만드는 모양이다. 새로운 언어 환경과 신조어의 양상이 안과 밖처럼 하나로 어울려 보인다.
신조어는 유행의 속성도 있어서 문화 현상이나 시대적 흐름을 엿볼 수 있다. 셀카봉은 ‘self camera’의 머리글자에 봉(棒)을 붙여 만든 말이다. 스마트폰으로 자기 사진을 찍는 시대 문명에 들어맞는 신조어가 아닌가? 신조어 중에는‘셀카’, ‘숲세권’처럼 가치중립적인 말도 있지만, ‘헬조선’이나 ‘-족, -녀, -남’으로 파생되는 이성(異姓) 혐오나 ‘삼포에, 오포, N포 세대’란 절망의 말도 있다. 부정의미의 신조어가 긍정의미의 신조어보다 많다. 젊은이들을 막아선 어렵고, 어두운 현실 문제가 많은 까닭 때문임을 알기에 안타깝다. 답답한 청년들이지만 가끔은 희망 담은 말도 만드나 보다
‘돈쭐’이라는 말이 그렇다. 인터넷에서‘돈쭐’을 만난 날 오랜만에 무릎을 쳤다. 소리 없이 웃기도 했을 것이다. 신조어를 만든 이들이 꼭 젊은이는 아닐 것이나 ‘돈쭐’만은 젊은이가 만들었어야 했다. 아니 꼭 그래야만 했다. 돈쭐이라니…. 시쳇말로 대박이다. 어렸을 때 부모나 어른들에게 혼쭐 난 적이 있다. 부모가 되어서,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들을 혼쭐낸 적도 있다. 났건 냈건 ‘쭐’은 강렬한 기억이다. 돈쭐이라니. 돈으로 혼쭐내던지, 나던지 뜨끈한 말이다.
사연은 이러했다. 가난한 조손(祖孫) 가정의 형제가 있었다. 치킨을 먹고 싶은 동생, 형 주머니에는 단돈 오천 원. 형제는 치킨 집으로 갔다. “아저씨, 오천 원 어치만 살 수 있나요.”심성이 착한 사람은 이런 상황을 빨리 파악하나 보다. 주인은 형제에게 치킨을 먹이고 앞으로도 먹고 싶으면 마음 놓고 오라고 했단다. 형이 이 사실을 가맹점 본점에 알려서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 졌다. 젊은이들이 인터넷으로 상점 위치와 소식을 퍼 날랐다.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 모르겠지만 인터넷에 ‘그 집 가서 돈쭐 내주자’는 말이 빛의 속도로 퍼져나갔다. 뒷이야기는 전하지 않으나 인터넷에 익숙한 젊은이들, 치킨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주인을 기분 좋게 돈쭐 냈을 것이 뻔하다. 치킨집 주인은 요즘 세상에 드믄 선한 일 저질렀으니 그 벌로 돈쭐 맞아 싸지 않은가? 웃을 일이 적은 세상에 웃음 주는 일이다.
‘돈쭐’은 아름다운 말이다. 돈쭐 뒤에는 가슴 찡한 서사가 하나씩 숨어 있다. 이 한 마디로 앞날에 잇달아 돈쭐 날 청년이 많기를 기대한다. 헬조선도 이겨낼 것이고, 포기 리스트도 하나씩 지워나가리라 믿고 싶다. ‘돈쭐’이란 말을 만들고, 돈쭐 낼 생각하고, 돈쭐 내는 젊은이들이 있는 한 돈쭐 낼 일은 이어진다. 올해는 ‘돈쭐’의 계보를 잇는 신조어가 하늘만큼 땅만큼 치킨 집만큼 아니 이 땅 젊은이들의 수만큼, 아니 두 배만큼, 세 배만큼, N 배만큼 탄생하셨으면 좋겠다. ‘퍼 날랐다’는 말에서 맑은 물 넘치는 두레박이 떠올라 상큼하다. 퍼 나를 말이 두레박에 넘치도록 만들어보자. 젊은이들이여.
<수필미학>, 2023.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