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자 사랑하기
두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남자가 있다. 성격이나 취향 등 모든 면에서 두 연인은 대조적이기에 마음을 정했다가도 다른 편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한다. 부모는 둘 다 사랑해야 한다면서 “왜 이런 사랑은 금지하는지” 남자는 이해할 수 없다. 소설이 끝나도록 선택은 없을 것이다.
게나찌노Wilhelm Theodor Genazino의 장편소설 『두 여자 사랑하기』에서 쉰두 살의 종말론자인 ‘나’는 잔드라와 23년째 만나고 있다. 아홉 살 연하의 잔드라는 긍정적인 성격에 생활력이 강해 빨래와 같은 일상의 소소한 일까지 챙겨주기에 그와 함께 있으면 ‘나’는 편안함과 아늑함을 느낀다. ‘나’에게는 연인이 한 명 더 있다. 한 살 아래인 유디트는 살림하기를 싫어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해 자주 우울해하지만, 때때로 기발한 모험도 태연스럽게 감행하여 함께 있으면 즐겁다.
가면을 바꿔 쓰듯 양면적 태도를 취하며 두 여자의 집을 오가던 어느 날 화자는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는다. 뭐든 적극적으로 하는 잔드라가 성관계 중에도 그를 위해 노력하였지만 그의 신체가 반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체의 노화를 실감하자 화자는 윤리적인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두 연인이 마주치거나,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각된다면?
고정 수입 없이 잡지나 학회지에 기고하고 가끔 강연을 하는 프리랜서인 ‘나’로선 잔드라를 선택하는 편이 실리적이다. 잔드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고 있고 퇴직 후에는 연금도 나올 테니. 교양 있는 인문학자인 체하며 지성이 부족한 연인의 질문에 대답만 해준다면 편안하게 노후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게 진정한 소통이라 할 수 있을까? 예술적인 심미안과 감수성을 지닌 유디트와는 마음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나’의 결심은 흔들린다. 둘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는 결국 그들이 지닌 장점 중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남자가 한쪽을 정리하는 과정에 관한 걸까?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걸까(이 소설의 원제는 Die Liebesblödigkeit, ‘사랑의 어리석음’이다)? 그렇다고 단정하기에는 화자의 독백이 산만하다. 연인들의 집을 오가는 거리에서, 세미나를 위해 방문한 도시에서, 마트에서 혹은 공원에서 연인들을 생각하다가도 금세 화자의 관심은 오히려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들로 향한다. “하찮을 정도로 작은 것들의 변호사”답게 작가는 화자의 시선을 아이의 투정에 침묵하는 엄마, 술에 취해 휘청거리는 퇴직자, 전차 정거장에서 욕을 퍼붓는 늙은 여자, 야외무대에 선 한물간 팝 그룹 등 이리저리 배회하게 한다. 화자의 시선 끝에는 발코니에 둥지를 튼 비둘기 한 쌍과 그걸 기어이 쫓아내는 이웃 여자도 있다.
게나찌노는 편집자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압샤펠Abschaffel』(1977) 삼부작으로 독일 문단에 이름을 새겼다. 독일 소시민 계층과 그들이 일을 통해 겪게 되는 자기소외를 그려냈다는 평을 받았던 작가가 거리를 배회하며 횡설수설하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하고 싶은 게 따로 있을 것 같다.
다르게 읽고 싶어졌다.
게나찌노는 여러 작품 속에서 동일한 모티프를 약간씩 변주하여 반복하면서 현대사회의 물결에 묻혀 덩달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을 그린다. 문화, 정치적인 배경에 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일인칭 현재시제로 건조하게 일상적 부조리를 묘사하는데, 안정적인 직업이 없는 주인공은 단일하고 고정적인 자아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자기 성찰과 동시에 유의미한 타인significant others이 바라보는 자신을 재인식해야 한다(Charles Horton Cooley). 현대사회에선 다른 이의 마음에 비친 자기 모습을 상상하면서 정체성을 확인할 기회가 적다. 분업화로 업무시간이 짧아지고 이직도 잦아서 동료들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과거 전일제 노동이 보장하던 지속성과 안정감을 찾지 못한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 없이, 불안정한 수입과 함께 삶에 내던져진 채 “내면의 동의 없이” 살게 된다(『이날을 위한 우산』, p.93).
물건을 고를 때 소비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 상상 속에서 특별한 즐거움을 주도록 변형된 이미지다. 산업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AI와 로봇이 사람이 하던 일을 대신하면서 노동자들은 자기 분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 중 대부분을 일터에서 보내던 사람들이 여가를 보내기 위해 눈길을 돌린 곳이 대중문화다. 결국 대중문화시장에서 개인이 소비하는 것은 상상을 통해 얻는 쾌락이다. 어떤 상품에 불만을 가져도 동등한 가치를 지닌 다른 상품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선택지는 항상 넘치며 소비자는 개인의 기준에 따라 새로운 선택을 한다.
소비는 개인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이자 타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회가 된다. 동시에 소비 과정에서의 손해를 줄이고자 다수의 의견을 참고하면서 타인의 관점을 자기의 것인 듯 믿게 되기도 한다. 또한 “자신들끼리의 동질성을 지속적으로 확신”하려는 집단이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차별하려는 욕구가 발생한다. 세상은 개인이 무엇에 관해 얼마나 고민하는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우리는 착란의 변증법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판의 목소리를 지녀야 한다. 그것이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태어나 나치의 파시즘이 초래한 폐허 속에서 패전국민으로 자란 게나찌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파시즘적인 질서의식의 전조는 공적인 공간에서 개인에 대한 […] 존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단지 개인적인 특성이나 특별한 이력 때문에 […]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도 이런 사태의 미묘하고도 위험한 성질을 간파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장애자들, 동성애자들은 […] 관용적인 듯한 분위기 속에서 […] 자신을 커밍아웃함으로써 얻게 되는 잠깐의 인정효과를 과대평가하는 반면, 이로 인해 그들에게 닥칠 장기적인 위험은 과소평가하거나 아예 인식하지 못합니다. […] 이 행위가 행해진 후에야 비로소 규범이 반격을 시작하니까요.”(pp.99-100)
비판은 지배적인 이념이나 행동 방식 또는 사회적 상태를 관습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지적이고 실천적인 반성의 노력이다(호르크하이머, Max Horkheimer). 지배적인 세력에 비판의 목소리가 더해져 합의 혹은 절충된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기를 반복하며 사회는 발전해 왔다. 그러나 파시즘은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다. 반대의 의견이 반영된 새로운 것이 아니라 동등한 가치의 다른 뭔가로 대체하는 것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연거푸 부정해도 결국은 긍정으로 끝나버리는 착란의 변증법” 같은 세상인 것이다.
개인의 삶이 어떻든 세상은 잘 굴러간다는 건, 세상이 잘 굴러가기 위해서는 개인의 처지가 어떻든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사회의 질서와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법뿐 아니라 도덕적인 잣대를 가지고 선택을 종용하는 사회에 대하여 게나찌노는 말한다, “모든 분명함이란 삶을 좀 더 견딜 만하게 하기 위한 게으른 타협”일 뿐이라고. 실제 삶은 너무 복합적이고 다면적이기 때문에 명료한 기준을 가지고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레스토랑 문 앞에 서서 비 내리는 거리를 보던 화자는 한 엄마가 유모차에 빗물 차단용 차양을 덮어씌우는 걸 보고 아기가 답답해할 거라고 상상한다. 그런데 차양 아래서 아기가 즐거워하며 손을 흔들자, ‘나’는 돌연 착란에서 벗어난 느낌을 받으며, 두 연인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는 고민이 어리석었음을 깨닫는다. 사랑의 어리석음die Liebesblödigkeit 때문에 “현실을 너무 과장해서 상상”했다는 것이다. 애초에 “두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니…. ‘나’는 누구와도 헤어지지 않기로 한다.
『한국산문』 202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