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으로 산다는 것
윤기정
문학 단체 회원들과 점심 먹는 자리였다. 음식 기다리는 동안 같은 식탁에 앉은 문우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중병(重病) 떨치고 일어난 사람이나 큰 사고에서 목숨 건진 사람들이 ‘이제부터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란 말을 하잖아요.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각오의 말로 들리기는 하는데, 어떻게 살겠다는 것인지 짚이는 게 없거든요….”다른 이들의 생각이 궁금했지만, 신통한 답을 기대하고 꺼낸 말은 아니었다. “막산다는 얘기예요.”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옆 식탁에 앉은 회원 한 사람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그거 막산다는 소리라고요.” 그가 확신에 찬 어조로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언제부터였던가? 기억을 더듬어 본다. 지난봄 제자의 부음(訃音)을 받았다. 제자의 아들이 아버지 스마트폰에 있는 모든 전화번호에 보낸다는 양해를 구한다는 말도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아니면 지난겨울의 끝에서 의지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가정사에 치여 쓰러져 몸과 마음이 상한 친구의 일에서 비롯했을까? 지난해 가을, 수년째 열매 맺지 못한 자두나무 두 그루를 베었다. 지나칠 때마다 베어낸 자리가 창백한 낯빛으로 바라보는 것만 같아서 여러 날 외면하고 지나쳐야 했다. 그 탓일까? 아니면 이 모두가 조금씩 마음을 갉고 있는 것일까?
의욕이 없다. 무슨 일을 해도 심드렁하다. 먹고 싶은 음식도 없고, 생각도 없다. 배고픈 줄도 모르겠다. 물 한 모금 마셔도 얹히는 것 같다. 생명 애착은 본능일진대 본능마저도 본성을 잃었나 보다.‘이제부터는 먹고 싶은 것 먹고,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자’는 동네 후배의 말에도 ‘그게 막사는 거랑 뭐가 다르담.’하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덤으로 산다.’는 말속에 들었을 법한 선량함과 모범적인 어떤 고운 심상(心想)이 사라졌다. 덤은 물건을 사고판 끝에‘거저, 조금’더 주는 상인의 아량일 뿐이다. 가치를 지불한 소중한 물건이 아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도 아니다. 덤으로 살겠다는 말은 막살겠다는 말에 가까운 의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이 나오는 바람에 옆자리에서 들려온‘막산다’는 확정적 말투가 정답인 양 ‘덤으로 사는 삶’의 이야기는 끝났다. 큰 병이나 사고 이후의 삶을 덤이라고 하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은퇴하거나 자녀들 다 성혼 시킨 뒤의 삶을 덤이라는 이들도 있고,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고 삶의 조건이나 양상이 급격하게 달라지는 일을 겪은 후의 삶을 덤으로 치는 사람도 있다. 날마다 사는 게 덤이라는 어떤 목사의 주장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다.
지금. 내 삶은 덤인가? 덤만 같다. 더 살아야 할 제자가 둘이나 먼저 떠나고, 저세상 사람이 된 친구도 여럿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과천 사는 친구처럼 거동이 불편한 친구도 적지 않다. 덤인 것 같은데 목적 없이 살아도 되는 건가? 의문이 머리 한편에 어둠처럼 웅크리고 들어앉았다. 밥상머리에서도, 강변을 걸을 때도, 운동할 때도, 좋은 사람과 술 한 잔 마실 때도, 컴퓨터 앞에 앉아 글과 씨름할 때도, 누워서 눈을 감고 피하려 해도 의문은 쉬지 않고 틈을 노려 차가운 소리로 묻는다. 고요가 기지개 켜는 새벽부터 또 다른 고요가 내려앉는 새벽까지 수시로 찾아온다. 귓전이며 머릿속으로, 소리로, 형상으로 나타난다. 붙들고 늘어진다. 이게 사는 거냐고? 삶이 맞느냐고? 덤이냐고? 덤이라서 이렇게 사는 거냐고? 종주먹을 들이댄다. 덤이 맞지만 그렇다고 답하지 않았다. 내 질문에 내가 답하지 못하는 나날이 아프고 힘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갉힌 마음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갉히고 사라지는 것이 마음이 아니라 시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슬픔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올랐다.
답? 위안? 어느 쪽이든 누구나 아는 세 가지 거짓말 중에서 위안을 찾았다. 위안을 찾았다기보다는 위안거리를 찾아낸 것이다.‘처녀가 시집가지 않겠다. 장수가 밑지고 판다, 노인의 어서 죽어야지’라는 세 거짓말이 그것이다. 그중에서‘어서 죽겠다’는 노인의 말을 뒤집어 보면 장수나 영생을 바라는 인간 보편의 희망이 보인다.‘희망’은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나 있지 세상에는 없지 않은가? 영생의 희망이 없으니 노인의 말은 이루어질 것이다. ‘밑지고 파는 장수가 없다’는 말에는 ‘덤’도 이미 셈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 숨어있다. 영생도, 덤도 없으니 애초부터 덤으로 주어지는 삶은 없었다. 삶은 삶일 뿐이고 소중한 현재가 아닌가. 그런 삶을 덤인지 아닌지 따진 게 얼마나 얄팍하고 가벼운 일이었던가?
제자의 죽음, 친구의 불행에서 끝을 느꼈거나 본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알 수 없는 내 시간의 끝이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의학과 과학의 발달로 인류의 수명이 길어졌다. 민주주의와 복지 정책의 확대로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 오십 년 전과 비교해도 우리의 수명은 놀랄 만큼 길어져서 백세시대란 말이 익숙한 세상이 되었다. 끝은 내일, 내일, 어느 내일의 뒤에나 있을 것이다. 마지막 현재까지 덤은 잊고 뜸을 생각하자. 여열(餘烈)로 음식물의 속까지 익히듯이 뚜껑을 열기 전에, 지나온 나의 시간을 하나하나 안아주면서 열을 나누는 마지막이 나쁘지 않겠다.‘한바탕 꿈이었을까?’이 시간이 지나면‘그때’라고 기억할 이 몇 달을 뜸들이기 시작한 시간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러나 ‘삶을 가장 덜 인식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말은 덤도 뜸도 잊고 살라 한다.
2023. 10. '한국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