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자리, 머문 자리

하영 김국현

나는 지금 미국 시애틀 5번 국도를 달리고 있다. 보잉사 투어를 가는 길이다. 오늘로 보름간의 미주 대륙 서부여행이 끝난다. 그동안 나는 여행지에서 소중한 일상을 보내는 세계인들과 눈빛을 마주하며 옷깃을 스쳤다. 때로는 이방인으로, 또 간혹 서먹하지만 정다운 이웃으로 그들의 짧은 순간을 함께 했다. 모두 표정에 행복이 충만해 보였다. 새로운 곳을 찾고 새로운 맛을 즐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어쩌면 멈추지 않는 호기심을 충족하려는 호모 사피엔스의 숙명이다.

긴 여정 동안 나는 내가 방문한 지역의 현지인들은 별로 만나지 못했다. 나처럼 스쳐 지나가는 여행객들과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수익을 얻으려는 가게나 숙소 종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찌 보면 여행자에게는 여행지를 배경으로 여행자들만의 세상을 보고 느끼는 것이 여행의 참모습이 아닐까 싶다.

모처럼의 여행으로 나는 무엇을 얻었고 어떤 것을 깨달았는가. 창가로 도회지의 풍경이 쏜살같이 다가오다 스치고 지나간다. 문득 프리츠 오르트만의 소설 〈곰스크로 가는 기차〉의 장면이 떠오른다. 꿈을 찾아 떠나는 곰스크를 행여나 남은 생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라도 들었던 것일까. 가지 못한 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까 봐, 떠나가는 막차를 바라보는 마음이 너무 아플까 두려워 그랬을까. 어쩌면 안락의자에 앉아 이것이 나의 유일한 안식처라고 항변하는, 영혼이 게으른 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내 안에 숨어 있는 방랑자 기질을 내세워 떠난 여행이었다. 노마드(nomade) 흉내라도 내보려고 했다. 틀에 박힌 삶의 방식을 바꾸어보고도 싶었다. 넓은 세상을 주유하다 보면 미처 깨닫지 못한 진리의 한 조각이라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도 했었다. 훌쩍 떠나면 나 자신의 굴레에서 해방될 거라고도 믿었다. 그런 연유로 내 인생 노트에 버킷리스트 한 줄 써 놓고 잉크도 말라버린 20여 년 세월을 기다린 게 마침내 현실로 찾아온 것이다.

여행의 출발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되었다. 긴 코로나 사태의 끝자락을 붙잡은 빛바랜 추억여행이었다. 금문교 북쪽 언저리에 있는 전망 좋은 공원이 첫 목적지였다. 대도시의 위용이 산을 넘어오는 안개구름 속에 가려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꿈을 찾아 떠나고 꿈을 이루고 나서 또 다른 꿈을 찾아 나서는 게 여행이다. 요세미티 산기슭에 자리 잡은 통나무 집 숙소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새벽의 여명을 달렸다. 솔트레이크시티를 경유하여 옐로우스톤으로 향하는 긴 여정이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나지막이 내려앉았다. 잡힐 듯하다가도 멀어지는 별을 바라보며 나는 일행들과 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촛불의 미학》에서 ‘책과 촛불은 두 개의 조그만 빛의 섬이다.’라고 했다. 이를 두고 어느 시인은 “마음의 정전이 되면 꼭꼭 숨겨둔 초를 찾아 불을 켠다네. 밤의 어둠과 정신의 어둠에 맞서려면 그 조그만 빛의 섬에 배를 대고 자주 닻을 내려야 한다네.”라고 읊었다. 아무런 깨달음 없이 허송세월만 하는 나의 영혼을 밝혀주기 위해 이처럼 새벽하늘의 별들이 내 머리 위에서 초롱초롱 빛나고 있는 것이다.

캐나다의 재스퍼 국립공원 안 피라미드 호숫가에서 80대 노부부를 만났다. 할아버지 몸집에 걸맞은 육중한 캠핑카를 타고 다녔다. 그들은 미국 중부 테네시에서 출발하여 캐나다 록키에 잠시 머물다가 6박 7일 일정으로 알래스카를 향해 떠난다고 했다. 지금 나이에도 이처럼 장거리 여행을 한다면 평생 얼마나 많은 여행을 했을까, 사뭇 짐작이 간다.

나는 지난 여정 동안 수없이 많은 곳을 다녔고, 머물렀고, 또 떠났다. 마치 여행이란 떠나는 것이라는 명제를 초등학교 시절의 숙제처럼 해내려는 듯이. 짐을 풀고 머물렀다가 싸고, 떠났다가는 또 머물고 하는 과정을 오래된 습관처럼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머물던 자리는 늘어만 갔고, 떠난 자리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삶도 이런 것이리라. 내가 살다간 자취는 지나간 세월 속에 갈무리한 채 추억만이 내 마음밭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어느덧 자동차 계기판에는 운행 거리가 자그마치 7,600km에 운행 시간은 120시간 남짓한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행은 현실에서 떠나는 것이지만 동시에 낯선 곳에 머무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 행선지를 찾아가는 것보다 한 곳에 머무는 데 의미를 두어야 한다. 오지도 않은 미래를 바라기보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줄 알 때 삶이 여유로워진다. 어디든 내가 있는 곳에 마음 닻을 내렸다가 아무런 미련 없이 내 이름 석 자만 남기고 훌쩍 떠나는 게 인생이 아니던가.

내일이면 귀국길에 나선다. 비행기 앞 좌석의 등받이 화면에는 내가 탄 비행기가 날아간 시간과 남은 거리를 시시각각으로 보여줄 것이다. 남은 삶의 시간도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리라. 때로는 직선으로, 또 때로는 긴 포물선을 그리며.

《에세이문학, 2023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