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빨간 실
인연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빨간 실’로 연결돼 있다는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내게도 빨간 실로 이어진 듯한 귀한 인연이 있다.
Y와의 첫 만남은 4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Y는 내가 6학년 봄에 전학 간 강남의 한 초등학교에 몇 달 뒤
전학 온 아이였다. 담임 선생님은 독일에서 온 Y가 학교생활에
빨리 적응할 수 있게 도우라며 그 아이를 내 옆자리에 앉혔다. 나 역시 전학생이었던 터라 선생님이 내준
숙제가 버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 걱정과 달리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Y의 집과 우리 집은 가까웠고, 엄마끼리 같은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한 인연이 있다는 사실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또 Y와
나는 두 명의 동생이 있는 데다 전학생이라는 공통점이 동질감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같은 성당에 다니면서
더욱 친해졌다.
이후 중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로 배정받아 매일 보는
사이가 되었다. 특강을 하러 오신 박완서 선배님께 인사하기 위해 교장실 앞에서 함께 기다리며 설렜던
기억, 가끔 종례 시간을 땡땡이치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반이 나뉘면서 얼굴 보는 횟수가 줄다가 내가 이사하면서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녀와의
연이 다시 이어진 것은 그로부터 16년 후였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둔 무렵, 나는 두 딸을 키우며 유치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영어를 가르치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Y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독일 남자와 결혼해서 독일에 살고 있는데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며 한번 만나자고 했다.
나를 보자마자 무척 반가워한 Y는 방송국에서 일한다고 말했다. 4년 후 열리는 독일 월드컵을 준비하기
위해 출장을 왔다가 문득 내가 보고 싶어 연락처를 수소문했다는 그녀. 오랜만에 조우한 친구와 대화를
나누면서 옛 시절로 돌아간 듯 즐거웠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나는 Y가
외국에 사는 것도, 방송국에서 일하는 것도, 한국에 출장을
온 것도 전부 부러웠다. 나 역시 미국에서 살다 왔지만 한국에서 ‘경단녀’로 두 아이를 키우며 갖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라 더 그랬다. 예고없이 찾아온 열등감에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그녀도 불편한
내 마음을 느꼈던 걸까, 아니면 독일과 한국의 거리가 우리 사이까지 멀어지게 만든 걸까. 짧았던 만남 후로 다시 연락이 끊긴 채 14년이 흘렀다. 그러다 동창들과 고등학교 졸업 30주년 행사를 준비하던 때였다. 친구들 사이에서 해외에 사는 동창들에게 영상을 받아 상영하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문득 잊고 지낸 Y가
떠올랐다. 연락처를 몰랐던 나는 온라인에서 그녀의 이메일 주소를 간신히 찾아 곧바로 메일을 보냈다. 며칠 뒤, Y에게서 영상을 보내겠다는 반가운 답장이 도착했다. 그녀가 보내온 영상에는 어색한 미소를 띤 독일인 남편도 함께였다. 그
화목한 모습을 보자 예전에 느꼈던 열등감은 사라지고 내 갑작스러운 부탁을 기꺼이 들어준 것이 마냥 고마웠다.
이번엔 우리의 인연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 와중에 독일 베를린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겠다는 막내딸 때문에 염치 불고하고 Y에게 연락을 취했다. 자기 집에 얼마든지 있어도 좋다고 흔쾌히 허락한
그녀 덕에 딸에 대한 걱정으로 심란했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나는 지금도 Y가
한국에 들어오면 꼭 만난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무려 40년
넘게 연결돼있는 빨간 실. 지구 몇 바퀴를 돌고도 남을 정도로 길게 이어지고 있는 우리의 인연이 무척
소중하다.
월간 [샘터] 2025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