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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기 월식이 있던 밤    
글쓴이 : 홍정현    25-03-17 11:23    조회 : 109

개기 월식이 있던 밤

홍정현

 

김연수 소설가의 낭독회는 혜화동 파랑새극장에서 진행되었다. 오십여 명의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지하 2층의 작은 소극장이었다. 코로나 팬데믹 3년 차. 여전히 실내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해야만 했다. 나는 안경에 김이 서리지 않게 KF94 마스크를 얼굴 면에 최대한 밀착시켜 쓰고 있었다. 일찍 도착해 줄을 선 덕에 자리는 맨 앞자리였다. 김연수 작가는 최근 발표한 단편과 미발표 단편을 낭독했다. 좋아하는 작가가 바로 앞에서 읽어주는 소설을 듣는 경험은 생각보다 더 즐거웠다. 하지만 이후 인터뷰 시간부터는 집중이 급격히 떨어졌다. 환기가 되지 않는 지하 공간이라 답답한 데다, 마스크를 꽉 끼고 있어서 그런지 숨 쉬는 게 편하지 않아 점점 졸린 듯 몽롱해졌다.

 

낭독회에 오신 분들에게 사전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중 몇 개를 뽑아 질문하겠습니다.” 진행자가 관객에게 미리 받은 질문지를 읽기 시작했다. “저는 팬데믹 동안 집에서 식물들을 키우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작가님도 혹시 반려 식물을 키우시는지요? 키우신다면 어떤 식물인지요? 홍정현 님의 질문이었습니다.”

멍하게 듣다 그만 화들짝 놀랐다. 질문한 사람이 나라고? 사전 질문지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는데? 거기다 반려 식물이라니. 우리 집에는 식물이 없다. 나는 무언가를 키우는 것에 재능이 없는 편이다. 수시로 아픈 내 몸 관리도 힘든 형편에 다른 생명까지 책임지는 건 무리였다.

혼자 어리둥절한 상태로 낭독회는 끝났고, 관객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작가의 사인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섰다. 둘러보니 나만 그 대열에 동참하지 않고 따로 서 있었다. 원래 사인에 별 관심이 없는 편이다. 몸이 불편해 빨리 나가고만 싶었다. 최대한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어둡고 좁은 극장을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극장 로비로 나오니 양쪽으로 서 있던 스태프들이 잘 가라며 인사를 했다. 나는 어색하게 답인사를 한 후 가파른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11월 거리의 찬 공기에 비로소 시원하게 숨이 쉬어졌다. 마스크를 내리고 심호흡하며 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지인이 개기 월식이라며 올린 달 사진을 보였다. 사진 안에는 지구 그림자에 가려져 붉게 어두워진 둥근 달이 작게 떠 있었다. 월식이 있었구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 봤지만 달은 보이지 않았다.

월식을 놓친 것을 아쉬워하며 대학로 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방금 극장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질문지를 정리한 스태프의 실수였거나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이 적었겠지. 이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 추리 방식이라는 걸 알았지만, 나는 그것을 슬며시 밀어내고 엉뚱한 것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깊은 지하 좁은 공간, 작가가 앉아 있는 무대 쪽으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사람들,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말하는 진행자. 그 장면은 오늘이라는 시간에서 싹둑 잘려 나와 독립된 작은 조각으로 떠다녔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극장에서 나는 우연히 우리 우주와 겹쳐진 다른 우주를 만난 것인지 모른다. 전화가 혼선되어 다른 사람의 통화가 들리는 것처럼, ‘탈우주적 교란이 일어나 우리 우주가 아닌 다른 우주의 장면을 목격하는 현상을 체험한 거다. 식물을 잘 키우고 식물에게 위로를 받으며 김연수 작가에게 반려 식물 질문을 적은 다른 우주 속 홍정현의 세계와, 식물을 키우면 다 죽여버리고 내 몸 건사하기도 힘들다며 수시로 인상을 쓰는 이 우주 속 나의 세계가 파랑새극장 안에서 잠시 포개져 일어난 혼선. 요즘 유행하는 평행우주 이야기다.

그런데 아무리 평행우주라고 해도 나와 같은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 식물을 공들여 꼼꼼하게 돌본다는 게 가능할까? 무엇이 우리 둘을 이렇게 다른 성향으로 갈라놓은 걸까? 왠지 그는 소박하지만 나보다 건강하고 즐겁게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지금 내게 부족한 면을 꽉 채워가며.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놓인다. 아마도 그쪽 우주의 홍정현은 낭독회가 끝난 후 가슴에 소설책을 곱게 안고서 작가의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서고 있을 것만 같다.

이것이 나라는 사람에게 더 어울리는 사고의 흐름이다. 개기 월식도 있었고, 김연수 작가의 미발표 소설의 내용도 그렇고(미발표라 밝힐 수는 없다), 이런 상상이 더 자연스러운 밤이었다.

 

 

 

수필과 비평2025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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