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받지 못한 손님
2008년 <<에세이플러스>> 5월호 개제 “딸년이 흑인하고 결혼을 한다니 울화가 치밀어 미칠 것 같아!” 미국에서 살갑게 지내던 지인이 전화로 알려준 청천벽력이었다.
흑인의 피부색에도 레벨이 있다던가. 타이티가 고향인 연탄색이나 진배없는 남자라니 어쩌면 좋겠냐고 울며불며 아무리 말려도 자기들끼리 결혼식 날짜를 잡았는데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땅이 꺼져라 한탄을 늘어놓는 그녀에게 나는 마땅히 위로 해 줄 말이 궁색했다.
한국과 미국 명절이면 잊지 않고 초대받았던 롱아일랜드의 그림같이 예쁜 집은 그녀의 딸이 부모에게 사준 것이었다. 휴가철마다 세계에서 유명하다는 곳곳으로 노부모를 모시고 다닐 만큼 그 딸은 효녀였다. 그런 노처녀가 혼사를 올린다니 축하를 열배나 받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한국인들도 꺼려하는 흑인과의 혼인 소식은 온 가족에게 시름덩어리를 안겨줬고 나 역시 걱정이 앞섰다.
뉴욕 퀸즈 후라싱에는 한국인의 주머니를 노리는 흑인강도 사건이 빈번히 일어났다. 밤중에는 그래서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내가 살던 후라싱의 노던가는 제법 번화해서 비교적 안전했다.
스트리트 주변엔 한글로 쓰인 점포들이 즐비해서 모국인양 착각하기 십상이었다. 고향 음식이나 한국 물건을 사는데 부족함이 없었던 146번가 입구에는 내 동족이 경영하는 대형 빨래방을 겸한 세탁소가 있었다. 그곳은 늘 한 아름씩 안고 온 밀린 빨래를 하려고 모인 흑색. 백색. 황색이나 그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피부색을 가진 손님들로 북적였다.
세탁소에서부터 35에브뉴가 만나는 길목엔 유럽풍의 3층짜리 주택 열채가 나란히 서있다. 빨간 벽돌이나 바랜 회색이 아니면 미색과 청색의 주택들은 노쇠한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는데, 담장 삼아 쳐놓은 철책은 옆으로 비스듬히 누웠거나 간간히 녹이 슨 부분이 뻘건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증기를 밖으로 뿜어내는 환풍기 소리가 요란한 세탁소를 왼쪽으로 끼고 돌면 건물보다 키가 더 큰 잣나무가 있었고. 한국 어린이를 대상으로 인형극을 하는 소극장이 그 건물 일층에 문을 열었다. 거기서 열 걸음만 더 걸으면 여름에 머루넝쿨과 새빨간 장미넝쿨이 뒤엉킨 미색건물에 나무 테두리를 두른 네 번째 주택을 만날 수 있었다.
낙엽이 뒹구는 가을 어느 날이던가. 그 집 일층에 흑인 가족이 이사를 왔다. 다음 날부터 그들은 동네가 떠나가도록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는 한동안 밤마다 파티를 벌였다. 침대에 누워있자면 쿵쿵 울리는 음악소리가 잠을 설치게 해서 은근히 부아가 끓었는데, 시끄러우니 속 시원하게 조용히 좀 해 달라고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해꼬지나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 집은 파티를 벌일 만큼 넓은 잔디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사방으로 뚫린 주차장 뒷골목에다 탁자 몇 개와 의자 여러 개를 놓은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음악소리를 듣고 사방팔방에서 흑인들이 모여들어서 그 집 잔치가 아니라 후라싱의 흑인들은 다 모였지 싶을 만큼 동네가 다 파티장으로 변해 버렸다.
어느 날 새벽에는 모인 인원이 백 명이 넘어서자 경찰차 두 대가 와서 그들을 해산시켜야 했다. 그 후부터 한국인들이 머리를 흔들며 흑인들을 왜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봄이면 화단에 고추며 깻잎이 심겼고 무리지어 핀 보라색 난초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빨간 벽돌로 지은 여섯 번째 주택의 30평쯤 되는 지하가 나의 보금자리였다. 75년 세월을 넘긴 집이라 그랬던가. 어찌나 쥐가 많은지 까만 바탕에 흰 점이 있는 수놈고양이와 밤색이 골고루 섞인 암놈 고양이 두 마리를 데리고 살았다.
어느 날 밤 9시경이었을까. 주차장이 있는 뒷골목에서 “탕~탕~탕”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는 컴퓨터에 앉아서 아이들이 화약을 터트리며 심하게 장난을 하는구나 생각했었다. 밖을 내다볼 생각은 없었다. 글 한 줄이나마 쓰려고 끙끙대고 있었으니까.
다음날 아침, 그 소리의 정체는 한 여자와 두 남자 흑인 삼인조 강도가 도망치는 옆집 한국인을 잡으려던 총소리란 걸 알았다. 부르클린에서 생선가게를 하는 그들 부부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퇴근 후 집 뒤 주차장에 주차하고 내렸는데, 가게에서부터 미행한 강도 세 명이 총을 들이대고 돈을 내 놓으라고 협박을 했단다. 돈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부부는 결사적으로 도망을 치자 강도가 총을 쏜 거였다. “탕. 탕. 탕” 세발의 총소리! 그날 생선을 판 돈이 삼천불이라던가. 돈을 목숨처럼 지킨 남자는 다리에 총상을 당했다.
미국에선 현찰을 많이 가지고 다니는 한국인을 노리는 흑인이나 스페니쉬 강도가 간혹 출범해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바로 옆집에서 총기사건이 벌어지는 그 나라에서 살던 내게도 피부색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나와 다른 피부색의 사람을 만나면 어색했다. 더구나 흑인 곁에 가기는 왠지 섬뜩해서 무섭기까지 했다. 물론 백인 곁에 가는 것도 꺼려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같은 동족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거니 묻어두었는데, 지인의 딸이 백인도 아닌 흑인과 결혼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걱정만 앞서는 걸 보면 피부색에 대한 나의 무의식적인 편견이 심한 걸 새삼 알게 됐다. 그런 시커먼 내 속 마음을 들여다보며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나에게는 나의 어린아이들이 언젠가는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리라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한 말이 떠올라 부끄러움을 느낀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던가. 더하여 인종차별이 심한 자국에서 흑인 남편을 선택한 지인의 딸은 용기 있는 여인이 아닐까.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찾아온 초대받지 못한 손님인 흑인 사위를 문전박대한 지인!
미국에선 보기 드문 효녀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던, 마음에 쏙 드는 사위에게라도 내주기 아까운 딸이기에 결혼식장에 가기를 완강하게 거부한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쓰리고 아플까.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세월이 약이 되어 피부색과 상관없이 언젠가는 사위를 사랑으로 품에 안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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