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와 고사리
고보숙
해마다 3,4월이면 고향인 제주도는 나에게 초여름의 바다처럼 무심히 푸르게 앉아 있는 한라산이 그녀의 팔 아래 조랑말처럼 키작은 오름들을 품고 있는 그림으로 떠오른다. 오름들은 가지많은 나무들보다 작고 보드라운 풀로 온 땅을 감싸 자라고 있다.
아침이면 오랜 친구와 마실 나온 듯 태양이 흰 안개와 함께 처녀의 가슴처럼 봉긋한 작은 오름들에 나타난다. 만질 수도 없이 잘디잔 안개들은 땅 속에 자고 있던 고사리 씨앗들을 깨우느라 이곳저곳으로 바삐 흐른다. 겨우내 잠들어 있던 고사리들이 놀라기라도 할까 안개는 소리도 없이 나즈막히 내려와 따스한 햇빛을 더 연하게 만들며 고사리들을 먹인다. 습기 먹은 햇빛 속에서 안개가 어린 고사리들을 키우는 것이다.
이맘 때쯤이면 어머니는 자주 오름에 오른다. 바다와 가까운 우리집과는 멀리 떨어진 오름이지만 어머니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아직 덜 자라 손가락길이만큼 작고 연한 고사리들을 한 줄기 씩 똑똑 꺾어 허리에 매단 망태에 넣는다.
성치않은 다리로 오름을 오르내리며 고사리 한 줄기를 꺾을 때마다 허리를 굽혀야 하는 일을 어느 한 해도 거르지 않는다. 헬스장에서 하는 운동과는 달리 고된 일이지만 고향 사람들은 그것을 고사리를 키워 준 산에 대한 감사 인사라며 해처럼 웃는다. 고된 일상 속에서도 늘 농담을 잃지 않고 사는 고향사람들이기에.
허리에 찬 망태가 가득 채워질 즈음이면 미련없이 오름을 내려 와 해가 중천에 오르기 전에 따 온 고사리들을 데쳐서 널어 놓는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여름 지나 가을 오듯이 그 일들을 한 번도 쉬지 않고 주저함 없이 마치고는 그제서야 지친 몸을 쉰다. 쉼이라고 해도 집안 일들은 그대로 남아 어머니의 손을 기다리고 있는지라 오름을 오르는 일이 어머니에겐 일탈이고 휴식이 아니었을까?
바다 위에 있어 맑디 맑은 고향의 바람과 오염되지 않은 투명한 햇빛이 데친 고사리를 말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저녁이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식구들처럼 고사리도 마루로 거두어 들여져 내일 아침 해를 기다린다. 더 이상 마를 물기가 없어 고사리를 키우던 안개만큼이나 가벼워졌을 때 어머니는 익숙한 손길로 곱게 싸서 상자에 넣고 우체국으로 간다.
고사리를 꺾으러 오름에 올라 꺾은 고사리를 말리고 포장해 부치는 모든 순간에 자식들을 생각하셨을 어머니, 가볍게 잘 말려져 배달된 고사리를 받아 들고서 나는 가슴 뭉클한 행복의 무게를 느낀다. 늘 내리쬐기만 하는 햇빛을 다시 해에게 돌릴 수 없듯이 이 행복감을 돌려 드리지 못하며 산다. 고사리들이 봄안개를 먹고 자라나듯 오십이 넘도록 나는 아직도 어머니의 정성을 받아만 먹고 살고 있다.
만지면 부서질듯 잘 마른 고사리가 수화기를 들게 하고 어머니의 목소리는 어느새 전화기 저편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09/03 북새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