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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년만의 해후    
글쓴이 : 정진희    12-06-27 16:09    조회 : 4,424
15년 만의 해후
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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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도봉산 입구, 12. 일주일 전 매표소 앞에서 만나자던 전화 통화 후 달력만 쳐다봐도 마음이 설레었다. 내가 너무 늙어버린 것은 아닐까? 서로 모습은 알아볼까? 하는 질문을 되새김질 하며 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했다. 이제 막 연록의 잎사귀를 가득 피워 올리기 시작한 벗나무 주위를 서성이자 매표소 문이 열리며 모자를 눌러 쓴 남자 한 분이 나온다. “야야, 진희 아이가.” 가까이 가니 옛 모습 그대로다. 조금 핼쓱해진 얼굴에 주름이 더 진해졌을 뿐. 15년 전 스승의 날 찾아 뵌 후 처음이다.
선생님, 왜 이리 마르셨어요?”라는 나의 첫 인사에 늙으면 영혼은 살찌고 살은 다 마르는 법이다.” 라며 예의 초탈한 미소를 지어 보이신다. “니 막걸리 할 줄 아나, 그럼 어데 가 뜨끈한 국물에 막걸리나 한 잔 하자. 오십 넘은 여 제자 하곤 술 한잔해도 되겠제.”
나무들이 시원하게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음식점들이 많은 도로변으로 향했다. 빗줄기가 제법 거센 대도 몇몇 열성 등산객들이 비옷을 입고 지나간다. 그 잠깐을 걷는데 지난 기억이 빗물처럼 쏟아져 내린다.
중학교 3학년 때 만난 담임은 수학선생님으로 교내에서 인격자로 소문난 분이셨다. 반장 선거를 하던 날이었다. 굳이 출마를 포기하겠다는 내게 이유를 정확하게 대라.”는 선생님의 종용에 난 끝내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자존심이 교실 마루를 뚫고 추락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눈물로 출마 포기는 받아들여진 셈이 됐지만 나는 교무실에 불려가 선생님의 책상 옆에 한참을 서 있어야 했다.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을 위해서 부잣집 애가 반장이 되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마음에 숨긴 채.
내 고집을 못 꺾을 것을 아셨는지 선생님은 일어서서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니는 너무 오만하다.”고 하셨다. 그땐 선생님을 배려한 내가 왜 오만한 것인지 몰랐다. 그러나 열다섯 살짜리 제자가 감히 스승을 배려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오만이었는지를 안 것은 세월이 많이 흐른 뒤였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을까. 이후로 나는 선생님과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데미안,죄와 벌,폭풍의 언덕같은 책을 읽고 편지를 보내면 선생님은 아버지가 없는 내게 아버지처럼 격려와 설명이 담긴 답장을 주셨다. 까만 철 대문에 달린 우체통 속에 선생님의 편지가 담겨있는 날이면, 내가 열세 살 때 마지막으로 받았던 아버지의 편지가 계속 오는 것 같은 행복감에 젖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교무실로 나를 부르셨다. 마침 창턱에 앉은 산 까치를 유심히 들여다보시던 선생님은 이런 저런 질문 끝에 사람의 삶은 소설하곤 다르다. 훨씬 더 힘들다는 것만 잊지 마라. 그리고 니는 나중에 글을 써라.”고 하셨다.
역시 그땐 글을 쓰라는 것의 의미를 몰랐다. 소설을 좋아했지만 그것을 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 본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 때의 나는 세상의 어떤 아버지도 부럽지 않은 충만 으로 가슴이 뛰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선생님이 말한 은 못 쓰고 있지만 에 대한 애타는 사랑을 안고 살게 된 것은 분명 그 때 선생님의 말씀 때문인 것 같다.
 
따끈한 순대국 한 술을 넘기니 묶였던 그리움이 풀어져 눈가를 적신다. 너무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한 죄송함과, 세상에서 처음으로 나를 한 인격체로 보아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응어리였다.
괴안타, 여 제자들은 시집가서 애 낳고 살림하고 남편 시중드느라 다 바쁘다. 지 본분에 열심히 잘 살면 됐제, 내 한 게 뭐 있다꼬.” 말씀 속에 서운함과 초연함이 함께 묻어있다. 주말이면 친구 분이 하시는 과수원에서 똥지게를 푸다 오셨다며 시커먼 얼굴에 거친 손을 내보이시던 수학 선생님, 모범생이건 문제아건, 부잣집 아이건 가난한 집 아이건 똑 같이 대해주셨던 그는, 똥지게 푼 돈을 모아 등록금을 못내는 학생들의 학비를 대주곤 하셨다. 늘 무뚝뚝한 표정 속에 따뜻한 연민을 감추었던 분, 나지막한 경상도 사투리가 정겨웠던 그는 그때 이미 시인이셨지만 2001년에 정식으로 등단하셨다.
내 이제사 말인데 내도 그때가 참 힘들었다. 봄만 되믄 어데론가 자꾸 가고 싶은기라.
아가 셋인데.......학교는 내가 아버지 노릇을 하게 해준 울타리인기라. 교육에 회의를 느껴 교감으로 명퇴를 하고 시골에서 국화꽃 농사로 살았제. 마누라가 고생이 많았다. 평생을 화장품 대리점 하믄서. 지금도 마누라 생각하면 자다가도 발끝이 저린다 아이가.”
그의 헛헛 웃음 속에 눈물이 고인다. 어느 누구의 삶이 고단치 않겠는가만, 시인의 심성으로 아버지의 자리를 지켜낸 그의 삶이 한 편의 시처럼 펼쳐진다. 얼마 전엔 지하철 역사에 당신의 시 <백목련>이 걸렸다며 그래도 이제 마누라한테 면목이 쬐끔 섰다.”고 말하는 선생님의 주름진 이마가 목련꽃처럼 화안하다.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한 이유를 그는 묻지 않았다. 붉어지는 내 눈시울에서 이유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으리라. 깊은 강 물 속에 묻힌 영혼의 끈이라도 있는 것인지, 15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이 문풍지만큼 얇게 느껴진다. 순대국 집을 나와 비 오는 길을 걷다보니 담장 밖으로 뚝뚝 떨어진 목련꽃잎에 선생님의 시가 얹힌다.
“(중략) 초야 치른 목련꽃술/ 이울었다 돌아서랴 // 봄날은 한마당 초례청/ 미추(美醜)없는 꽃불이 타오른다.” (신선규 <백목련>)
세상일이든 사람이든 첫 마음을 잊지 말라는 뜻의 싯귀가 일침이 되어 가슴에 꽃불이 켜진다. 그 옛날 선생님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마음 속 어둠이 하나씩 꺼지던 그 등불처럼.
팔순을 앞둔 선생님과 도봉산역에서 헤어지면서 그동안 받은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게 오래 사셔야 해요.’라는 말은 못했지만 그 말 없음말 있음보다 더 간절함을 아시는 듯, 오른손을 들어 보이시며 황급히 지하철에 오르신다. 봄비 속으로 멀어져가는 열차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선생님을 따라 올린 내 손은 내려올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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