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프랑스 문학기행에서 인상 깊었던 것 중의 하나는 대서양 연안 마을인 쿠베르빌에서 맞닥뜨린 일이다. 앙드레 지드의 흔적을 좇아 어느 교회묘지를 찾아갔을 때였다. 마침 그 시간대에 교회에 결혼식이 있어 비좁은 흙길에는 승용차들이 줄을 잇고, 넓지 않은 교회 앞마당도 쌍쌍이 성장(盛裝)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화사했다. 묘지를 훑고 나와 비좁은 마당에서 우리의 대형버스가 방향을 돌려 귀로를 재촉하려는데 길 한쪽으로 주차된 소형차가 문제였다. 바짝 길가로 세웠다고는 하나 그 차의 오른쪽 모서리와 우리 버스의 앞머리가 닿을락말락한 상황이었다. 우리 기사가 생밤송이 다루듯 조심스럽게 핸들을 조작하면서 전진과 후진을 거듭하느라 안간힘을 쓰는 동안 버스 앞으로는 뒤늦은 축하 차량들이 줄줄이 밀려와 사정은 꼬이고 있었다. 마침 버스 앞쪽에 앉아 그런 정황을 다 보고 있던 나의 애타고 답답한 심경이라니. 우리도 우리지만 한껏 멋을 부리고 시간 맞춰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서둘렀을 그들의 갑갑한 처지가 적잖이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헌데 운전자들은 오래 기다릴 줄 알았고 누구 하나 경적을 울리거나 혹은 급하게 나와 성질을 부리거나 삿대질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렬 저 뒤끝의 차가 후진을 하더니 이어서 그 앞쪽의 차가 후퇴를 하고 연달아 차량들이 옆 골목길로 빠지거나 아예 돌아가며 길을 내주었다.
무려 한 시간 가까운 시골길의 교통체증을 해소시킨 것은 그들의 인내와 자발적인 양보의 덕이었다. 우리 버스의 운신 폭은 물론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수십 초면 신호가 바뀌어 흐름이 이어질 것인데도 경적을 빵빵 울려대거나 창을 열고 험한 말을 퍼붓는 현장을 수없이 목격한 우리가 아니던가. 쓸데없는 나의 조바심을 내심 부끄러워하며 내 입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던 감탄.
“아, 저들의 톨레랑스!”
돌아와 이것을 소재로 글 한 편 쓰려고 하는데 마침 신문에서 연관되는 칼럼 한 조각을 읽게 되었다.
“집에서 무슨 신문 보세요?” 라는 제목의 정호승 시인의 글이었다.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처음엔 무심코 대답했다가 이제는 씩 웃고 만다. 질문한 사람이 구독하는 신문과 다른 성향의 것을 본다고 하면 갑자기 대화가 어색해지고 심한 경우에는 관계가 악화되기도 해서다. 인터넷 매체가 활성화되어 얼마든지 여러 신문을 열람할 수 있는데도 구독하는 신문을 사람의 사회적 정치적 입장을 파악하는 잣대로 삼기 때문이다. 모든 언론이 다 한목소리를 낼 수는 없다. 문제는 사회구성원들이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고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는 데 있다. 얼굴이 다르듯 우리는 다 다르다. 강물처럼 함께 흘러갈 수 없을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그후 친지들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똑같은 질문을 받게 되면 나도 “글쎄요.”하며 얼버무린다. 좋은 자리를 행여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그리고 프랑스 사회에서 특히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톨레랑스’를 생각한다.
‘견디다, 참다’라는 뜻의 라틴어 tolerare에 어원을 두고 있는 ‘톨레랑스’는 기본적인 그런 의미 외에 보다 넓은 사회적인 함의(含意)를 갖고 있다. 사전적으로 두 가지의 말뜻이 있는데 첫번째가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다. 이것은 물론 남의 생각이나 행동양식을 존중함으로써 자신의 사상과 이념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관계에서 나와 남을 동시에 존중하고 포용하는 내용을 품고 있다.
앞의 자동차 이야기에서 나는 톨레랑스를 우리말의 아량이나 인내 정도로 이해하고 사용했다. 하지만 이 말은 단순히 동양적인 너그러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톨레랑스는 나와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한 걸음 나아가 그들과의 평등한 공존(共存)을 바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은 나와 색깔이 다른 사람을 감싸고 불쌍히 여기는 감성적 능력이라기보다 인간의 다양성, 이질성, 복잡성을 존중하는 이성적, 지적 능력이다. 위에 언급한 신문의 칼럼은 바로 우리들의 이런 능력의 부족을 지적하며 아쉬워한 게 아닌가 싶다.
두 번째의 말뜻은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되는 자유”다. 이것은 권력에 대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려는 의지를 품고 있다. 아주 간단한 예로 ‘인도 위의 주차 허용’같은 것이다. 권리는 아니지만 공권력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왜 톨레랑스인가》의 저자 필리프 사시에에 의하면 톨레랑스라는 말은 16세기 초 유럽에서 처음 등장했다. 위그노전쟁과 같은 신구교도 사이의 처절한 갈등이 오래 지속되었던 곳에서 싹을 틔운 것이다.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신앙의 다양성에 직면한 국가 권력의 대응방식이 문제가 되었고, 톨레랑스는 종교에 대해서는 탄압하지 않는 정치와 그런 정치를 실현하는 군주의 구체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시작되었다. 말하자면 극단적인 앵톨레랑스 행위가 있은 후에 그에 대한 반성의 산물로 제기된 사상이다. 점차 그 의미가 확대되다가 18세기 말에 이르러 국가의 처신을 지칭하는 것과 동시에 오늘날의 ‘인간관계의 바람직한 방식’으로서의 윤리적 측면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는 말한다. “톨레랑스한다는 것은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상대방의 의견이나 생각을 바꿀 수도 있지만 그대로 용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톨레랑스는 의도적인 자세입니다. 또한 용인이되 의도적인 용인이라는 점에서 무관심이나 포기와 다른 것입니다.”
프랑스인과 우리를 단순 비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톨레랑스가 강조되는 사회라면 억압이나 강제가 아니라 토론과 설득의 문화가 자리 잡지 않을까.
가부장적인 문화 탓인지 아니면 잘못된 오랜 정치풍토에 기인한 것인지는 모르나 우리 사회는 너무나 권위적인 흑백논리에 집착하고 있는 듯하다. 일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념, 지역, 종교, 세대, 계층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는 것도 내 방식이 아니면 무조건 잘못이라고 몰아세우는 편견이나 독선이 부추긴 결과가 아닐까. 나와 다른 사람일 뿐인데 ‘다름’을 ‘틀림’으로 단정하고 배척하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톨레랑스는 사실 프랑스에서만 강조되는 가치가 아니다. 일찍이 논어에서도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이라 하지 않았던가. 군자는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관용과 융화를 동시에 아우르는 개념이다. 나의 주관을 뚜렷하게 지니되 같지 않은 남과 조화를 이루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면 좋겠다.
<<에세이스트>>2011년 5.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