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라 봄꽃!
꼬리 잘린 도마뱀 같은 2월의 끝. 무거운 외투를 걸치고 해진 신발을 신은 겨울이 다리를 절뚝이며 보잘 것 없는 희망을 향해 나아간다. 하긴 아직 봄이 온 것은 아니다. 산하는 안개인지 연기인지 모를 잿빛 기운에 휩싸여 있다.
으깨진 얼음조각이 발길에 차인다. 보도블록 경계 틈에 푸른 풀이 움트려면 상기 아니 가까웠다. 앞쪽에 초라한 행색의 사내가 걸어온다. 비껴쓴 털모자 바깥으로 머리카락이 삐져나왔다. 비틀거리는 것을 보아 낮술이라도 한 것일까. 사내의 퀭한 눈길이 흔들리다 허공을 향한다. 내 발걸음도 덩달아 헛짚인다.
겨울 동안 폐쇄되었던 주차장에 임시 장터가 생겨났다. 조잡한 현수막을 내걸고 확성기로 손님을 부르는 한편 옷가지를 펼치는 상인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봄맞이신상품대방출'. 조끼, 짚업티, 패딩 점퍼……. 메이커가 불분명하지만 한결 가벼워 보이는 등산 의류다.
한켠으론 좌판이 늘어섰다. 푸성귀를 파는 노파의 시든 눈빛이 가슴시리다. 빗, 브로치, 머리띠 같은 잡동사니 생활용품을 파는 장애인 부부는 연신 손짓을 해댄다. 그들 간 침묵의 대화는 묵음 처리된 화면을 보듯 실감이 나지 않는다. 봄이 왔다고 해도 무거운 짐을 진 채 새 옷을 짓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겨울이 폐점을 서두르지만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빈 하늘을 비껴나는 기러기 한 마리가 겨울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듯 창턱에 작은 새 한마리가 내려앉는다고 해서 봄이 오는 것은 아니다. 우연히 날아들었거나 길 잃은 새일 것이다. 논 자락에 황새 한 마리가 외발로 서서 사유한다고 해서 봄이 오는 것 또한 아니다. 새는 지난겨울 먹이를 찾아 나섰다 돌아오지 않는 어미를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아직 봄이 온 것은 아니다. 낡은 아파트 단지 여기저기에 이삿짐 트럭이 짐을 부리고, 폐지 수집 노인이 쓰레기더미를 헤집어 종이박스를 간추린다고 해서. 겨우내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려 있던 연(鳶)이 사라지고, 새끼를 밴 길고양이가 기척에 놀라 차바퀴 밑으로 숨어든다고 하더라도. 또 학교 게양대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취학을 앞둔 아이들의 쾌활한 소성(笑聲)이 환청처럼 귓바퀴를 간질인다고 해도.
그렇다고 봄이 오지 않는 것 또한 아닐 것이다. 봄은 다만 옛 기억 속 꽃상여처럼 망설이며 더디 올 뿐이다. 상여는 앞으로 나아가다 뒷걸음치고 물렀다가 앞으로 나아가며 앞으로 나가는 듯 발 구름 하더라. "에헤라디아 상사디야~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상여는 황톳길을 지나고 논둑길을 따라 산모퉁이로 접어든다.
찾는 이 없는 봉분(封墳)에 잔디가 돋듯 그렇게, 어떻든 봄은 올 것이다. 그러니 깨어나라 들풀, 피어라 봄꽃! 세상의 끝, 어느 허망하고 어둑한 들녘,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이윽고 봄이 오면 지나온 겨울 또한 멀지 않으리.
*<<한국수필>> 3월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