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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루지 못한 수녀의 꿈    
글쓴이 : 김형자    13-06-21 06:00    조회 : 5,072
이루지 못한 수녀의 꿈
김형자
등산화에 아이젠을 채우고 한적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어제 내려서 살포시 녹은 눈을 직신직신 밟을 때마다 설탕시럽이 터지는 상큼한 소리가 났다. 온 몸으로 숨을 몰아쉬며 비탈길을 따라 능선으로 올라서자 폭죽 같은 환성이 잠긴 목 줄기로 터져 나왔다. 죽어가던 흑갈색 나무들이 올올이 살아나 하늘빛으로 환생한 것인가. 하늘이 발 아래로 내려앉았는지, 내가 하늘로 솟아올랐는지 분간할 겨를도 없이 나긋나긋 녹아버렸다.
 
살다보면 호사를 누리기도 하고 캄캄한 미로에서 악사를 만나기도 한다. 그것이 인생이려니 하면서도 수렁에서 헤매곤 한다. 유독 지난날의 회한과 미련에 갇혀 있을 때면 내 흉허물까지 보듬어줄 수 있는 가까운 지인을 찾기 마련일 텐데 자꾸만 고3때 담임이었던 수녀님을 뵙고 싶었다. 선교 차 중국으로 떠나시던 마지막 날이 언제였는지 모르게 아득한데 M과 J를 만난 후로 부쩍 더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M과 J는 미션스쿨을 함께 다녔던 동창생이다.
미술을 전공한 수녀친구 M은 크고 펑퍼짐한 체구라서 굼뜰 것 같아 보이지만 매사에 동작이 빠르고 사붓사붓했다. 복잡한 문제를 극히 싫어하는 명쾌한 성격인지라 그늘이라곤 없는 그녀의 얼굴은 언제나 싱글벙글 함박웃음이었다.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함께 지원했던 수녀원으로부터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그녀는 부적합이라는 결정이 내려졌고 나는 선택을 받았었다.
수도자라고해서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님의 얼굴로 살아가야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조신한 고양이같이 굴었던 나는 부뚜막 위에서 교태(?)를 부리고, 솔직 담백하고 당당한 그녀는 개척 수녀회로 옮긴 후 자신의 길을 야무지게 잘 걷고 있지 않는가. 그녀가 나를 위해 기도하겠다며 축일을 물었을 때 냉담 중이라고 털어 놓았다. ‘왜 이런 일이?’ 라며 놀라는 그녀에게 ‘그 분은 성당 감실에만 머무르지 않는다’고 한 술 더 떠서 응수하자 변절자의 뻔뻔한 얼굴을 불가사의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길은 선택 받았다고 해서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3박4일의 피정은 수녀원에 입소하는 과정 중 마지막 관문이었다. 일 년 동안 부모님 몰래 준비해오다가 어쩔 수 없이 상황을 알려야했다. 병중에 계셨던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셨고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는 아버지의 간곡한 호소 앞에서 나는 어떤 길이 하늘의 뜻인지 알 수 없어 막막할 뿐이었다. 내 길을 찾아가겠노라고 몸져누우신 어머니를 밟고 지나갈 용기가 없었다. 하늘은 선택의 자유를 허락할 뿐, 대처할 지혜는 내 몫이었던 것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수녀원을 찾았을 때 J는 피정에 합류하려고 막 들어서는 중이었다.
 
다음 해, 모교에서 5월의 여왕을 선발하는 성모성월 행사에 임원으로 초대를 받았다. 청아한 플룻 연주로 '구노'의 <아베 마리아>가 장미 향기와 어우러져 신성한 감흥이 무르익어갈 때 첫 허원을 마친 수녀들의 대열 속에서 검정 수도복을 입은 J를 보았다. 기품이 느껴지는 성스러운 그녀를 담담한 눈길로 더듬고 있을 때 그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우리는 짧은 시간동안 긴긴 무언의 얘기를 주고받았다. 애잔한 송아지 같은 그녀의 큰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을 때 연주는 멈췄고 동시에 수녀들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던 즈음에 그녀가 결혼해서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를 찾지 않았던 이유는 작은 배려에서였지만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까지 접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아무 쓸모 짝이라곤 없는 암 덩어리 따위와 싸우는 중이라니. 남쪽에서 최북단으로 향하는 전철을 타고 종점에서 내려 한 시간 기다린 후 달그락 거리는 시골길을 40여분 버스로 달리는 동안 죄인의 심정으로 살아왔을 그녀가 자꾸만 짠해지는 것이었다. 더욱이 8~90년대 전자 시장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던 모 기업 회장의 손녀라는 이유까지도 숨어 살아야하는 운명의 짐을 더 무겁게 했을 것이기에.
 
드문드문 외떨어진 가옥이 고즈넉해 보이는 동네 언덕바지 아래 하얀색 목재로 갓 지은 그녀의 소박한 집이 있었다. 대문이나 울타리 대신 앞마당인양 펼쳐진 전답 사이에서 세 마리 진도견이 낯선 방문객을 사납게 짖어대며 맞아주었다. 아담한 거실 넓은 창문으로 스며드는 평화로운 햇살은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환하게 비추고 아픈 그녀를 위해 남편이 씨앗을 틔웠다는 키 작은 야생화들과 도란도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그 무리 속에는 부부가 수확한 콩이나 들깨, 야콘 등을 담은 크고 작은 광주리들도 사이좋게 더불어 앉아 있었다. 수수한 옷차림에 화장기 없는 말간 피부, 초연한 눈빛과 낮고 조용한 말씨에 이르기까지 농군의 아내로 충직하게 살아온 지난날의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행복하다 말했고 내 눈에 비친 모습도 분명 행복해보였다. 살아 온 날이 행복이었다면 그걸로 족하리라.
 
대설주의보가 내리고 눈 덮인 길이 꽁꽁 얼어붙은 날, 수녀님께서 여고 교장으로 근무하시는 학교를 찾았다. 우스꽝스러운 파자마 차림으로 얼음을 지치는 말괄량이 여학생들의 왁자한 환성이 고막을 가르고 여기저기에서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에 웃음 봇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네들의 천진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난 시절의 내가 아프게 어른거렸다. 수녀님은 내 꿈에 날개를 달아주고자 부단히 애 쓰셨다. 부모님의 반대로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지만 불씨를 지피려 열렬히 지지하고 응원해준 유일한 스승이었다. 그녀가 청소년 교육 사업에 일생을 바치며 올곧게 걷고 있는 그 길은 나를 방황과 좌절의 소용돌이로 몰아 세웠던 아픈 꿈이었다. 어언 회갑을 넘어선 150cm 작은 키의 그녀가 모교의 장학금을 장려하는 일에 일조하는 제자를 까치발로 반갑게 얼싸 안아주었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바위도, 나무도, 첩첩 산길도, 하늘 길도, 바람 길도 온통 고요한데 잔등성이 너머로 던진 무심한 눈길을 홀리는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사계절 내내 같은 자리에 변함없이 있었건만 단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았던 좁다란 길이었다. 수없이 지나치면서도 볼 수 없었던 길. 숲으로만, 나무의 군락지로만 알았던 그곳에 눈이 쌓이자 끊어질듯 이어가며 아스라이 정체를 드러낸 것이었다.
문득 수녀님의 말씀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간절히 기도를 하면 그 분은 어떤 형태로든 내게 길을 보여주셨단다. 학교가 재정 악화로 존폐 위기에 처했을 때 너를 내게 보내주었듯이. 이 사업에 쓰기 위해 너를 아껴 두신거야. 그 분은 너를 통하여 나의 길을 걷도록 도와주셨다. 비록 미미하여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지금 걷고 있는 그곳이 너의 길임을 잊지 말아라.”
회한과 갈증의 긴 어둠을 밀어내며 하얗게 뻗어나는 길을 넋을 풀어 놓은 채 바라보았다. 어리석고 눈멀어 볼 수 없었던 그 길은 오래 전부터 가장 가까운 내 마음 속에 있었던 것을. 어느덧 내 마음에는 자분자분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지천명을 넘긴 굳은 어깨 위로 몽환의 날개가 돋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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