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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의 작별    
글쓴이 : 박래순    13-09-10 15:02    조회 : 4,655
                          유년의 작별
 
                                                                    
 
 
   일곱 살이 되던 내 생일에 키보다 세 배나 높은 누마루 위에 올라앉아 시선을 모았다. 사립문을 밀고 금방이라도 들어 올 것만 같은 사람을 기다렸던 것이다. 옷고름 저고리를 입은 예쁜 여인이 색동옷과 별사탕, 소꿉놀이 상자를 가지고 올 것이니까. 여섯 살이 되던 할머니 회갑 날에 내 볼을 비비며 울먹이던 여인. "내년 네 생일에 꼭 오마!" 하던 그 여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어머니였다.
 
 기다리던 어머니는 종내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에게 "엄마는 왜 안 와? 엄마 데려다 줘." 떼를 쓰다가 겨드랑이를 꼬집혔다. 할머니는 표가 날까 봐 눈에 띄지 않는 곳만을 잘도 골라 꼬집었다. 내 여린 겨드랑이는 퍼렇게 자주 멍이 들었다. 없는 어미를 어디 가서 찾아오느냐고 야단치던 할머니는 곧바로 눈물을 보이며 "불쌍한 내 새끼!" 하며 나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애증으로 오장이 삭아버린 할머니는 마당에 돌아다니는 약병아리를 잡아 내 생일선물로 삼계탕을 끓였다. 쫄깃한 다리 살을 내입에 넣어주며 "엄마는 이제 안 와, 너는 공부만 잘하면 돼, 그때 보고 싶은 엄마도 만날 수 있어."라며 달랬다. 할머니가 가슴을 치는 것은 사랑하는 막내아들의 전사로 억장이 무너진 때문이었다.
 
 부산으로 공부하러 간 할머니의 막내아들아버지는 1950년 6.25가 터지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여 전쟁터로 나갔다. 그리고 그 해, 조부모님은 하늘이 무너지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아직 체온이 느껴지는 막내아들의 전사통지였다. 날벼락 같은 소식에 식음을 전폐하며 울부짖는 조부모님 앞에 어느 날, 불룩한 배를 안고 초췌한 젊은 여인이 나타났다. 어머니는 그간의 피맺힌 사연을 풀어놓았다.
 
 당시 아버지는 육군 1사단에 배치 받아 진격 하던중 적의 공세에 밀려 낙오되어 현역인 상태에서 유격부대로 합류하였다. 임진강가에 매복하여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배를 수색하며 인민군을 찾아냈다. 그때 힘겨운 피난길에 지쳐 죽어가던 어머니를 발견하여 마을 민가에 업어다 주었다. 평양에서 여학교에 다니던 어머니와 언니, 두 자매는 마을 친인척과 함께 임진강을 건너 강화 교동으로 먼저 왔다. 가족이 모이는대로 뒤따라오겠다던 부모님과 오빠들을 기다렸지만 여러 달이 지나도록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어머니는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해줬고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마음을 의지하게 되었다. 소속유격대에서 연합대규모 상륙전투를 앞둔 어느 날, 아버지에게 본능적인 영감이 전해진 것이었을까, 혹 자신이 전사하면 부모님을 찾아 소식을 전하고 아기를 낳아달라며 어머니에게 당부를 했다. 사랑하는 여인의 뱃속에 새 생명이 움트고 있는 것을 알면서 전투명령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은 얼마나 초조했을까. 행여 모른 척 전쟁터를 떠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까.
 
 시멘트 포대 종이 한 면에 쓴 편지와 군번, 유품, 사진을 부모님께 전해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전투지로 떠났던 아버지는 싸늘한 주검으로 귀환했다. 어서 전쟁이 끝나고 고마웠던 한 남자의 아기를 낳아 오순도순 함께 살고 싶었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총탄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목숨을 구해주고 위로해줬던 아버지와의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 그때 열아홉 살, 죽음을 각오했다. 피난민들은 아기를 낙태하고 부산으로 함께 떠나자고 설득했다. 어머니는 온갖 유혹을 뿌리쳤다. 피난민들을 따돌리고 아버지의 본가로 찾아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할머니를 따라 새벽마다 장독대 위에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했다. 아버지의 영혼이 또 하나의 아들로 태어나 주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빌고 또 빌었다. 천지가 얼어붙는 추운 겨울날, 할머니와 어머니의 염원은 허사가 된 채 여식인 내가 태어났다. 간신히 몸만 추스른 어머니는 가슴에 대못 하나 박힌 채 집을 떠나야만 했다. 아들이 아니라 딸을 낳은 것이 못내 섭섭하긴 했으나 어른들의 내침이 꼭 그 이유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딸자식 하나 믿고 네 청춘을 묶어 놓을 수는 없다. 아기와 정이 들기 전에 어서 가거라. 서로 살 냄새 알기 전에 떠나야한다" 라며 집안 어른들은 어머니의 등을 떠밀었다. 꽃처럼 젊은 어머니의 발목을 묶어 청상으로 살게 하고 싶지 않은 배려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실향민인 고향 사람들이 모여 사는 부산 용두산 판자촌에서 재봉 일을 하고 있는 언니를 찾아 떠났다. 핏덩이를 떼어놓고 떠나가는 어머니의 발걸음은 얼마나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을까.
 
 시대를 잘 못 만난 어머니와 나는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참사로 생이별이 된 것이었다. 조부모님은 죽은 아들의 영혼이 환생하여 돌아왔다고 애지중지 나를 키웠다. 그러나 나의 삶은 팍팍할 수밖에 없었다. 밥 지을 때 솥 한쪽에 고여 있는 미음을 떠내 젖 대신 먹으며 자랐고 가끔 아래채에 사는 아재 아줌마의 가슴팍을 파고들기도 했다.
 
 내가 여섯 살이던 할머니의 회갑 날, 믿기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애절했던 천륜의 풋풋하고 고운 엄마의 살 냄새를 맡았고 짭조름한 눈물 맛을 보았다. 또 엄마가 먹여주는 밥을 먹었고 혼자서 하던 소꿉놀이도 함께 해봤다. 고운 색동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사진도 찍었다. 어머니의 품은 솜이불처럼 포근하여 어린 짐승처럼 가슴팍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피붙이 딸과 함께 며칠을 보낸 어머니는 "미련 두지 말고 하루빨리 새 출발 하라”는 어른들의 다그침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머니는 첫돌 때에 찾아왔다가 상처받았던 것처럼 또다시 덧 상처를 입고 떠나야만 했다. 그때의 작별이 내가 유년시절에 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일 줄이야.
 
 나는 생일날이 되면 누마루에 앉아 또 온다던 어머니를 기다리곤 했다. 다음 해 일곱 살이 된 생일에도, 여덟 살에도, 그것은 내 유년 시절의 가장 큰 연례 행사였다. 어머니, 보고 싶어요. 이제는 모정(母情)이 화석(化石)이 되었을 어머니! 꼭 한번 보고 싶습니다.
 
                                                                                                               
         
누구에게나 유년(幼年) 시절이 있다.
사람은 그 유년 시절의 추억을 간직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  (한국 산문  2013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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