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일식집에 가면 매실로 만든 우메보시 라는 장아찌를 맛볼 수 있다.
익은 매실을 소금에 절인 후 빨간 시소 잎을 넣은 물에 담가두면 빨간 색깔로 변하면서 매실특유의 시큼한 맛으로 입에 침이 고일 정도로 신 맛이 나는데 생선회를 먹을 때 비릿한 맛과 냄새를 없애주는 향미역할을 한다. 일제시대 학생들 도시락 한 가운데에 이것을 넣어 밥이 쉬는 것을 막고 반찬대용도 했는데 그 모양이 일본기와 같아 히노마루 도시락이라고 불렀다.
그 일장기를 변형한 욱일기가 요즘 네티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일본기의 태양문양에 퍼져 나가는 햇살을 표현한 형상으로 한 때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메이지 시대 육군 기로 지정되어 태평양 전쟁 시 일본의 해군이나 전함에 사용함으로써 제국주의를 상징한 깃발이 되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종전이 되면서 욱일기의 사용도 중단되었는데 해상자위대의 창설 시 다시 군기로 제정하면서 부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욱일기 라고 하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욱일승천기 라고 부른다. 이 기(旗)에 대한 거부감이 누구보다 강한 우리가 “승천”이라는 단어까지 붙여 주고 있는데 “하늘로 솟아 오른다”는 승천(昇天)의 뜻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동아시안 축구경기에서 일본 응원단이 들고나온 욱일기에 맞서 우리는 :namespace prefix = st2 />이순신장군과 안중근의사의 대형 초상화를 응원석에 걸었다가 말썽이 되어 철거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신성한 스포츠정신이 전투의 개념으로 까지 바뀐 한. 일간의 대결을 보면서 일본에게 패한 경기결과만큼이나 씁쓸한 마음이었다. 더구나 런던 올림픽에서 박종우 선수의 독도 세레모니가 말썽이 된 것을 의식한 축구협회가 초상화를 철거하자 우리 붉은악마 응원단이 아예 응원을 중단해 버린 사실을 아홉 시 뉴스로 들으면서 이것이 누구를 위한 오기인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문화산업의 열풍을 타고 욱일기가 새로운 디자인의 옷을 입고 패션계에 널리 퍼져가고 있다고 한다. 우리 유명 아이돌 멤버들이 의식 없이 욱일기 문양의 옷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가 하면 지난달 안산 벨리록 페스티벌에 욱일기 화면이 등장한 무대장면이 유명 외국 DJ에 의해 연출되었다. 욱일기 문양의 티셔츠, 악세서리 등이 상품으로 등장하고 나이키의 에어조던 농구화 깔 창에 이를 새긴 제품이 신상(新商)으로 나왔다. 일본의 연예인들이 애국의 상징으로 욱일기 무대의상을 입고 나오는가 하면 일본의 게임과 만화에도 줄줄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욱일기 열풍의 이면에는 일본의 아베정권이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군사대국화로 나아가려는 고도의 전략이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성의 시대, 이처럼 디자인을 앞세운 문화열풍의 현상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우리가 이를 저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도 문화산업으로 디자인된 태극문양을 앞세워 문화전쟁에 뛰어 들어야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이 상책이다.
또 하나의 이웃인 중국을 상징하는 오성홍기에 대한 우리의 정서나 감정(感情)은 어떤가? 북괴에 의해 자행된 육이오전쟁에서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간 우리에게 조국통일의 꿈이 아른거린 순간이 있었다. 바로 그 시점, 때 아닌 오성홍기를 앞세우고 처 들어온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해 일사후퇴의 쓰라림을 겪은 후 3.8선 원 위치로 되돌아 와 지구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게 된 운명이 되었다.
청 태종이 10만의 병력으로 국토를 유린한 병자호란의 치욕은 어떤가? 한양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두 달도 버티지 못하고 항복의 예를 갖추려 삼전도에 나가 청 황제 에게 세 번 절을 올리고 아홉 번을 땅바닥에 머리를 찧으면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소현 세자를 비롯한 수 십 인이 볼모로 끌려가고 포로로 잡힌 군인들을 제외하고도 60만 명이나 되는 선량한 백성들이 심양으로 끌려갔다. 이들 중 몸값을 주고 풀려난 소수의 사람과 몸을 망치고 환향녀(還鄕女)로 돌아온 여인들을 제외하고 심양의 노예시장에서 모두 노예로 팔려가는 처참한 운명을 맞았다.
영토분쟁의 역사는 이보다 더 심하다. 이조 숙종 38년에 청나라와 확정된 국경에 의해 간도지방은 우리의 영토였다. 이 후 간도가 개간되자 청국은 자국의 영토라고 강변하며 간도의 우리농민들을 철수시켰고 마침내는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과 청국간에 간도협약을 맺으면서 간도의 영유권은 영원히 중국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요즘에는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이어도를 자기의 바다 안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며 중국감시선과 항공기의 순찰 범위 안에 포함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짓도 하고 있다.
우리의 고대역사에 대한 중국의 역사왜곡은 어떤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걸쳐 대국을 건설했던 고구려의 빛나는 역사를 동북공정이라는 국책사업을 통해 자신들의 역사에 편입시켰다. 그리고는 고구려를 고대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단정하면서 시간적 영토확장을 꾀한 그들이다.
지난번 TV 에서 분통터지는 뉴스를 봐야 했다. 10년 전, 중국 북부 변방의 아무짝에도 쓸 모 없는 야산을 30년간 임차한 후, 피와 땀으로 박토를 개간하여 사과 과수원을 일군 한 교민의 이야기다. 몇 해가 지나 탐스런 사과가 열리면서 개간의 결실을 맛 볼 즈음 중국정부의 북방개발정책으로 땅값이 치솟은 것이다. 이에 땅을 임대해준 200호 가량의 마을 지주들이 땅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다가 마침내는 작당해서 도끼와 톱을 들고 나타나 과수 전부를 찍고 베는 장면이 방영된 뉴스였다. 출동한 공안원들은 팔짱을 낀 체 보고 있을 뿐 누구 하나 말리는 자가 없었다. 살기 등등한 그들의 야만성과 폭거를 보면서 말 할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지만 우리 정부나 언론도 나만큼 힘이 없는지 그 후 이렇다 할 외교적 항의나 만행을 비난하는 신문기사를 보지 못했다.
오늘 날 미국과 함께 G2로 굴기(堀起)한 중국과의 선린우호는 지정학적인 면에서나 경제적 측면에서 필수적이다. 박대통령이 취임 후, 일본을 제치고 중국으로 날아가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맺은 것도 그들의 막강한 군사력과 넓은 시장 때문이며 이것이 국제관계의 현실이다. 수 천 년을 두고 내려온 중국과 우리의 관계는 시대가 변해도 바뀔 수 없는 역사적 숙명이 되고 있다.
중앙일보 도쿄총국 김현기 국장의 기사에 의하면 일본 최대 주간지 <슈칸분슌(週刊文春)> 최근호에 “한국에 배로 갚아주마” 라는 제목에 “귀찮은 이웃(한국)을 침묵하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부제가 달린 섬직한 기사로 한국의 반일감정에 욱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미국 내 친한파(親韓派) 격리를 추진하고 한국에 수출하는 부품에 100% 관세를 부과해 한국경제를 고사시키자는 등 유치한 주장까지 일본 내 반한 감정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전한다.
새 정부가 들어선지 6개월이 넘도록 한. 일간 정상이 얼굴을 맞대지 않고 있다. 국가간의 관계도 가정간의 관계와 같을 것이다. 가장이 서로 친하면 가족간에도 친밀한 관계가 생기며 어려운 문제도 쉽게 풀린다. 중국의 넓은 시장이 중요하듯 일본의 정밀(精密)시장도 소중하다. 우리가 중국에 파는 가전제품, 기계류는 일본의 중요부품이 없으면 만들 수 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 하면 무조건 싫다”는 우리의 정서를 다시 한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미워도 다시 한번> 되돌아 보는 지혜를 생각해 볼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