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끝
2월은 노루 궁뎅이 같은 달, 꼬리 잘린 도마뱀의 몸통 같은 달. 늘리려 해도 늘려지지 않는 불량 고무줄 같은 달입니다. 그런가하면 2월은 왕따의 달, 돌연변이 엑스맨의 달, 박제(剝製)와 화석(化石)의 달, 조임 나사가 빠져 헐거운 달,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 불완전한 달이기도 하죠.
예년보다 추위가 덜하지만 아직은 코끝과 뺨에 와 닿는 바람이 차갑습니다. 2월의 끝자락에서 2월을 돌이킵니다. 2월의 일수는 왜 28일, 어쩌다 29일밖에 없을까? 다른 달은 30일이거나 31일인데. 고대 로마의 2대 황제 누마(Numa)가 종전의 ‘로물루스력(1년이 10개월로 1월, 2월이 없었음)’의 편제를 ‘누마력’으로 개정하면서 그렇게 정한 것이라고 하는군요.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것이어서 누구의 잘못도 아니련만 2월을 생각하면 애처로운 느낌이 가시지 않습니다.
‘누마력’을 보완한 ‘율리우스력’을 거쳐 현재 통용되는 ‘그레고리력’에서도 2월의 운명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2월은 사이에 낀 달, 어중간한 달, 이도저도 아닌 달이랍니다. 2월과 비슷한 달이 또 있군요. 11월입니다. 두 달은 모두 두 번째 달이에요. 2월은 앞에서 두 번째, 11월은 뒤에서 두 번째지만요. 2월은, 한 해를 시작하는 첫 달이어서 중요한 달로 여기는 1월과 봄의 소식을 물어오는 반가운 3월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 같은 달입니다. 한편 11월은, 연중 가장 쾌적한 달로 꼽는 소슬한 10월과 크리스마스와 세밑이 있어 설렘과 회한이 교차하는 12월 사이에 낀 존재감 없는 달이지요.
두 달 모두 겨울을 연결고리로 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2월은 겨울을 빠져나오며 뒤돌아보는 달이고, 11월은 겨울로 향하는 초입에 위치한 달이어서 미세한 느낌 차이가 나지만 말예요. 무엇보다 날씨가 엇비슷합니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어도 찬 기운이 은근히 뼛속을 파고들어요. 연무가 끼는 날도 많아 주위는 잿빛 모노톤이고 해는 구름 속에 숨어 창백한 빛을 흩뿌립니다. 2월의 몽롱한 사물은 끌탕처럼 끓어오르고, 11월의 침울한 산하는 석면(石綿)처럼 가라앉아요.
2월의 거리를 걷다보면 바닥이 그다지 미끄럽지도 않은데 흐릿한 꿈속에서처럼 발이 헛짚여요. 허방다리를 만나 갑자기 발밑이 푹 꺼져버리는 느낌이 들곤 한다니까요. 2월은 무엇을 시작한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딱히 떠오르지 않는 달이기도 합니다. 아니 도대체 그 무엇을 시작하기라도 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2월은 부조리의 달, 불안한 실존의 달, 꿈속 빛바랜 풍경을 닮은 달입니다.
그런 눈으로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2월의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사물이 같은 부류, 같은 계통이에요. 홀로 된 것들, 응달에 있는 것들, 세상의 모든 버려진 것들이라고나 할까요. 걸인, 대낮의 취객, 보행보조기에 의지해 걸음을 옮기는 노파, 시든 채소를 파는 좌판 아낙네, 식은 붕어빵을 파는 노점, 땡 처리 옷가게, 찢긴 현수막, 폐타이어 더미, 고장 난 신호등, 중단된 공사현장 가림막, 나뭇가지에 부적처럼 걸린 휴지, 발을 절뚝이는 길고양이, 드나드는 새 없는 둥지….
아메리카 인디언은 일 년 열두 달의 이름을 기후와 풍경의 변화, 마음의 움직임을 빗대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로 정했다고 합니다. 검색해보니 시적인 상징과 은유가 여간 울림이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2월은 물고기가 뛰노는 달(위네바고 족), 너구리 달(수우 족), 홀로 걷는 달(체로키 족), 새순이 돋는 달 (카이오와 족), 토끼가 새끼를 배는 달 (포타와토미 족), 기러기가 돌아오는 달(오마하 족)이라고 하네요. 그중 체로키 족의 '홀로 걷는 달'이 2월의 정서와 가장 걸맞은 것 같기도 합니다만.
봄이 오긴 올 것이에요, 머지않아. 릴케의 ‘가을날(Herbsttag)’ 시구가 생각납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집이 없는 자는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고, 옷이 없는 사람은 새 옷(봄옷)을 짓지 못한 채 오래도록 그러하겠지요. 봄에 늦가을을 떠올리는 것이 조금 생뚱맞군요. 그렇다면 셸리의 ‘서풍의 노래(Odd to the West Wind)’는 어떠한가요?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으리(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계절의 순환과 고통 끝 희망을 노래하는 잠언이지만, 온전히 마음에 와 닿지는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지금 ‘봄’이 온다고 해서 ‘겨울’인들 멀리 있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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