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윤동주(1917.12.30-1945.2.16)
여정의 마지막인 11월 28일, 잃어버린 별을 찾아 떠나는 여행처럼 조금 설레었다. 추위가 제법인데도 붉은 단풍나무 길이 반겼다. 스물여덟, 참으로 아까운 나이에 떠난 시인 윤동주를 만나러 가는 길은 그래도 가벼웠다.
청운동에 있는 문학관은 규모가 작았다. 몇 십 년 사용했던 수도 가압장을 리모델링한 곳이라서 그런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시인의 순수를 그대로 전하고자 그리도 작고 분위기 있는 집으로 설계한 것이다.
닫힌 우물을 상징한 10여 평 쯤 되는 어두운 문학방에서 영상시가 흘러내렸다. 문득 후쿠오카 감옥의 벽도 그러한가 싶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곳에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까. A4 용지 두 장 정도의 천정 문만 빤한 문학방은 <자화상>에 목이 메었을 청년의 심사를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독립운동이라는 죄목으로 끌려간 이국에서 날마다 이상한 주사를 맞을 때 두려움도 짐작되었다. 눈물인 양 흐르는 영상시에 일행은 벌써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시인의 언덕에 올라앉으니 밤이라면 별이 쏟아질 듯 하늘이 가깝다. <별을 헤는 밤> <서시>를 그 곳 즈음에서 지었으리라는 연유로 ‘서시문학비’가 세워졌나 보았다. 연희전문 시절, 인왕산 언덕에 올라 별에 환호했을 것이다. 해방 6개월 전 그토록 환호하던 별들을 못 본 채 시신이 되어버린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기만 하다.
개발의 기회를 그 곳도 비껴가지 못했나 보았다. 저 아래 마을 어디쯤 잘 생긴 청년이 살았을 누상동 9번지가 헐어버린 다음에야 알려진 것이다. 다행히도 윤동주 문학관과 언덕이 마련되었으니 그의 맑은 시혼은 언제라도 우릴 반길 것이다.
그는 소설가 김송(1909~1988)의 집, 누상동 9번지에서 후배 정병욱과 하숙을 했다. 훗날 정병욱(1922-1982)은 시인의 육필 원고를 출판한다. 섬진 강 옆 망포 정병욱의 집에 고이 보관했던 원고가 아니었으면 전설로만 남았을지 모른다. 친구 정병욱 덕분에 시인의 유작이 우리에게 읽혀지기 시작했다.
만주 길림성 명동에 윤동주 시인의 집이 있었다. 몇 년 전 여름 길림신문주최 세계문학 상시상식 덕분에 백두산으로 가던 길이었다. 초라한 유물 몇 가지가 있는 집으로 가는 신작로는 개망초와 쑥대머리가 거칠게 우거져 있었다.
옥수수 밭 저 앞들에는 해란강이 흘렀다. 문득 이름까지 바꾸며 말달리던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인 듯 해란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뜨거웠다. 이젠 개천이 된 해란강처럼 선구자들의 삶도 잊혀져 가는 게 서글펐나. 옥수수 밭 바람은 그들을 잊지 말라는 듯 거칠게 불어왔다.
시인의 집 마당에는 나팔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한나절도 다 못 핀 시인의 일생처럼 참으로 애잔했다. 더욱이 눈물처럼 맺힌 이슬은 벌써 햇빛에 사라지고 있었다.
나그네들은 우물가를 서성였다. 나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발길을 돌렸다. 우물의 둥근 나무 뚜껑을 열면 시인의 <자화상>이 보일 것 같아서였다. 마침 작은 벽면 칠판에 삐툴뻬툴 써 있는 백묵 글씨가 보였다.
‘윤동주 오늘의 청소당번’
‘김옥분 오늘의 지각생 ‘
‘구구단을 못 외운 학생 문익환 ’
‘오늘 떠든 학생 송몽규.’
1930년 대 아기자기한 초등학교의 교실풍경이 서글픔을 풀어주었다. 보고 또 본 그의 자화상처럼 그리운 친구들이 우리의 발길을 웃음으로 잡는 것 같았다. 패,경,옥...시인과 공부 했을 이국적인 아름의 소녀들도 새삼스러웠다. 시인의 외사촌으로 동갑내기 친구인 송몽규는 날마다 이상한 주사로 몰골이 된 시인의 모습을 증언한 사람이다. 그도 차디찬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영원한 큰 별 안 중 근
길림성 시인의 집 가까이에는 선바위가 있다. 안중근 의사가 날마다 권총 연습을 했다는 곳이다. 선바위를 지나노라니 여러 개의 총구가 가슴을 스쳤다. 오가는 길목에서 우리를 영원히 지켜낼 것 흔적인 것 같아 그의 애국 혼을 새삼 우러렀다.
남산 안중근의사 박물관에서 ‘大韓獨立’ 혈서를 보았을 때도 그러했다. 3년간 풍찬노숙을 하면서도 國家安危에 마음을 다한 그의 勞心焦思가 뭉클했다. 비문에 새겨진 낙관은 ‘나라 잃은 설움을 영원히 잊지 말라!’는 듯 단호했다. 손가락을 툭! 잘라 피로서 지킨 고국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다.
큰 별 하나 가슴에 달고 돌아오는 길에 내 다섯 손가락을 쥐었다가 펴 보았다. 어느 곳 하나 아프지 않을 손가락이 없었다. 홀로 손가락 자르며 걸어 간 님의 길이 얼마나 힘겨웠으랴. ‘혼자 가면 길이지만 여럿이 가면 역사’라는 안내자의 말을 들으며 영원한 별, 그가 이룬 역사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는 혼자였지만 그가 이룬 역사는 참으로 위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