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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월의 노래    
글쓴이 : 김창식    14-05-18 18:59    조회 : 7,951

           오월의 노래
 
 아시는지요? 오월의 나무에는 작은 물고기들이 산다는 걸. 바람이 일 때 마다 가로수의 나뭇잎들이 차르르르 초록물고기 떼처럼 반짝여요. 아침 공기에 섞여 싱그럽고도 배릿한 풀냄새도 끼쳐오네요. 1980년은 시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무척 중요한 해였습니다. 그해 오월도 마찬가지로 푸르고 싱그러웠어요.
 그해 봄 나는 직장생활 7년 차 신임과장으로 진급한 터에 미혼 노총각이라는 점만 빼곤 거칠 것이 없었죠. 난 지금 회사의 상징물인 새 '고니'가 그려진 통근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참이랍니다. 어느 날 출근길에 그녀를 처음 보았어요. 새로 이사 온 것인지, 전부터 버스를 이용했는데 못 알아본 것인지는 확실치 않아요. 아무튼 언제부터인가 그녀가 마음속에 깊이 들어와 앉았군요.
 출발지에 가까운 정류장이어서 버스에 오르니 여느 때처럼 빈자리가 많았어요. 굳이 그녀 옆자리에 앉는 것이 멋쩍었지만 용기를 내어 그녀 옆에 비집고 앉았답니다. 그녀는 긴 머리에 항상 고개를 숙여 책을 읽고 있는 단아한 모습이었습니다. 매끄럽고 가무잡잡한 얼굴에 그날은 헐렁한 티셔츠를 입었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그날도 옆 사람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책을 읽고 있어요. 에세이나 교양서적일 텐데.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감추며 힐끗 곁눈질해 보았죠. 책을 읽는 모습이 그날따라 처연해 보여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나는 무슨 이야기로 말을 걸까 궁리했죠. 무슨 책이에요? 아니면, 어느 부서에 근무하세요? 자연스럽긴 하지만 너무 진부하지 않은가. 그럴 듯하면서도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 거리가 없을까. 간결하면서도 산뜻하고  유머와 에스프리가 담긴.
 그때 버스에 설치된 라디오에서 긴급뉴스를 알리는 안내방송에 이어 아나운서의 긴장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남쪽 일원에서 시작된 폭동이 일부 불순분자의 난동으로 소요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정부는 더 이상 이를 좌시할 수 없어" 며칠 째 계속 중인 국가 현안에 대한 속보를 전하고 있는 것이죠. 국민을 지키는 것이 존재 이유인 국민의 군대가 국민을 공격한다는 것이에요. 마음속에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더군요.
 보도 통제가 되고 있지만, 믿기 힘든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을 뿐더러 진실은 그런 것이 아니란 것쯤 누구나 알고 있었죠. 버스 안에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더군요. 설마 승객 모두가 지리적으로 떨어진 가상공간의 일로 치부하고 그러려니 여기는 것일까요. 아니면 짐짓 못 들은 체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바다 속처럼 깊은 침묵이 자리하는 가운데 누가 자리를 고쳐 앉는지 의자의 삐걱거림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크게 들려왔어요. 차창 밖으로 침침한 눈길을 돌리니 가로수의 여린 나뭇잎들이 반짝임을 멈추었네요. 나뭇잎들이 죽은 물고기[死魚] 떼처럼 떨어져내리며 수런대요. 김광규의 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에서처럼.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버스가 속도를 줄이며 큰 원을 그리는 것이 목적지에 다다른 모양입니다. 회사 건물과 새 형상의 청색 로고가 보여요. 나는 시린 상념에서 깨어났죠. 아울러 그녀에게 아직까지 말을 건네지 못했음을 깨달았답니다. 나는 그녀에게, 아니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습니다. 입안에 서걱거리던 모래가 메마른 입 주위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더군요.
  "부끄러운, 참으로 부끄러운 세월이에요, 그렇죠?"
 그녀가 읽던 책을 덮으며 언뜻 나를 쳐다보나 싶었어요. 착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같고요. 이윽고 차가 회사 마당에 멈추어 섰죠. 사람들이 주섬주섬 일어나며 내릴 채비를 해요. 사내 앰프방송을 통해 귀에 익은 <라데츠키행진곡>이 들려왔어요.
 삶의 숨은 뜻이랄까, 살다보면 바라마지 않으면서도 감히 꿈꾸지 못한 일이 뜻하지 않게 이루어지기도 하더군요. 통근버스에서 책을 읽던 그녀와 우여곡절 끝에 그해 말 결혼했죠. 잿빛 구름이 낮게 드리워 하늘과 땅의 경계를 허물고 스산한 바람이 일며 꼬리 긴 호루라기 소리를 내던 11월 하순 어느 날이었습니다.
 루나 예나*. 그로부터 30여년이 흐른 지금, 나는 그녀의 주름진 얼굴에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더듬으며 푸르게 빛나던 오월의 젊음을 보아요.
 
 오월이여
 너의 노래 들려다오
 우레보다 더 큰 침묵의 노래 
 한 바탕 웃음으로 모른 체하려는 내게  
 
*루나 예나(Luna Llena): 만월(滿月, full moon)이라는 뜻. 라틴 그룹 로스 트레스 디아망테스Los Tres Diamantes)가 부른 몽환적인 비가(悲歌). 우리나라에선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사랑스런 번안제목으로 알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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