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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김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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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을 읽는다    
글쓴이 : 김혜자    14-07-27 00:55    조회 : 18,543

                                

 

매월 마지막 수요일 오전 11시 반. 그의 집 앞에 차를 대며 우리 모임은 시작된다. 잠시 후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허리 굽은 노인이 나타난다. 지팡이를 짚고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레 다가오는 노인의 모습은 마치 울퉁불퉁한 바닥에 비친 일그러진 그림자만 같다. 예전 그리도 반듯하고 핸섬했던 김 교장의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S공고의 초대부터 3대까지 세 분의 전직 교장과 나, 그리고 또 한 분이다. 초대 김 교장은 여든 후반이고, 그 뒤를 이은 이 교장과 유 교장도 일흔을 훌쩍 넘겼으며 또 한 분은 구십대다. 이들에 비하면 육십 중반을 넘긴 나는 꽃띠인 셈이다.

벌써 20년이 지났다. 삼각지에 있던 S여중이 중계동으로 옮길 때였다. 학교 재단 측에서는 공고를 하나 더 신설했다. 당시 S여중의 김 교장을 중심으로 거의 일 년 전부터 차근차근 새 학교 창립 준비에 들어갔고, 지금 모이는 이들이 그때 같이 수고했던 사람들이다.

새 학교의 신입생 입학전형으로부터 학교 운동장을 고르는 허드렛일까지 구석구석 우리의 손이 닿지 않은 게 없다. 같이 일하게 된 신임 자동차과, 전자과, 디자인과의 전공과목 교사들은 대부분이 교직경력이 짧은 청년들이었다.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매사에 기꺼이 앞장을 섰고, 그러다보니 전교생 400여 명의 이름 정도는 저절로 외워졌다. S공고 창립멤버로서 땀도 보람도 함께했던 그때 우리는 남다른 정을 쌓았고, 그렇게 쌓인 정이 지금도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

김 교장은 교사 따님을 둔 때문인지 집안일까지도 챙겨야 하는 여교사들의 입장을 잘 이해해준 온화한 분으로, 가끔 퇴근길에 같은 버스라도 타게 되면 여교사들에게 먼저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정중히 존댓말을 쓰던 상사였고 훌륭한 리더였다고 기억한다. 상사란 직장에서 직급이 높은 사람을 이른다. 리더란 단순히 직급이 높은 것만이 아닌, 그로 인해 부하직원들이 더 업무성과를 올리거나 직장 생활이 즐겁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칠 때에 주어지는 호칭이라 생각한다. 교사 하나하나를 따뜻한 말로 격려해주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줬던 그는 진정 따르고 싶은 흔치 않은 리더였다.

항상 유 교장의 차로 그를 모신다. 평소에 워낙 자상하게 모두의 안부를 챙기는 분인지라 서둘러 인사를 여쭤야한다. 그러지 않으면 거꾸로 인사를 받게 되기 일쑤니까. 우리는 지난 한 달 각자 ‘별고 없음’을 시시콜콜 확인한다. 당뇨로 오래 고생하는 김 교장의 건강상태가 항상 우리의 주관심사다.

그는 퇴임 후 낚시도 즐기고 그림도 그려 전시회를 여는 등 한동안은 활기차게 보내는 듯했다. 그러나 지병인 당뇨병에 합병증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시력이 몹시 나빠졌고 몸 이곳저곳에 탈이 났다. 취미생활도 하나씩 접어야만 했다. 7년 전부터는 혼자서 외출이 어려울 만큼 거동마저도 불편해졌다. 지난 가을에는 더욱 악화되어 과연 겨울을 넘길 수 있을지 염려될 정도였다.

낯선 식당에 차려진 음식을 그는 알아보지 못한다. 먹음직한 건 가까이에 설탕이 든 건 아예 멀리 제쳐둔다. 오른팔이 자유롭지 못해 뭐든 젓가락에 걸치듯 올려 미끄러지기 전에 후루룩 국수 들듯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눈길을 돌리곤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까지 식성은 좋아 잘 드신다는 것이다. 식욕 좋은 것이 당뇨병의 한 증상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그가 식사마저 제대로 못한다면 더 서운할 것 같다.

언제부턴지 그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어설픈 표정의 얼굴에는 여기저기에 핀 검버섯만 늘어가고 있다. 그는 지금 얼마큼의 고통을 견디고 있는 걸까.

“나와 줘서 고마워요”

만날 때마다 일일이 손을 잡으며 그가 하는 말이다. 우리와 만나는 날이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이라며 모처럼의 나들이를 종일이라도 만끽할 것처럼 반가워한다. 그러나 찻집에 앉아 얘기 몇 마디를 나누면 그는 금방 피곤한 기색이 되어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만다. 그만 모셔다드릴 시간이 된 것이다.

한창 시절 우리들이 믿고 따랐던 그. 이젠 사회적인 영향력도 없고 혼자서는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를 존경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여전하다. 보지 못하는 한 달 내내 그의 건강이 궁금하고 걱정이 된다. 사람이 살아가며 존경과 신뢰와 고마운 마음으로 쌓은 정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건가보다.

거실에 앉아 벽에 걸린 그림을 본다. 그가 유화전시회를 마치고 준 것이다. 먼 산자락 사이로 강물이 흐르고, 앞 둔덕에는 온통 주황색 꽃들이 어우러진 그림을 보노라면 그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화사한 한 폭 봄날의 풍경화에서 나는 지금 그의 가을을 읽고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다가올 겨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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