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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거지    
글쓴이 : 채선후    14-11-21 12:51    조회 : 5,405
                                      설거지


 
나는 설거지를 한다.
나에게 설거지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시작하는 일이고, 하루를 정리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설거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설거지를 버리지 못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에게 여자라는 말이 죽기 전까지 벗어나지 못 할 말이라면 설거지도 죽기 전까지 짊어지고 가야할 나의 일이 될 것이다. 일은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설거지는 일보다는 차라리 숙명에 가까운 업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이다. 설거지는 나의 업보(業報)이다. ()은 원인이 되는 행위로 나타나는 결과인 보()를 받는다고 한다. 이렇게 하루 세 번 이상 하는 설거지가 지긋지긋할 때면 전생에 얼마나 씻어야 될 일을 많이 했을까 생각해 본다. 어떤 여자는 결혼을 했어도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산다는데 나는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으니 아마도 전생에 지저분하게 살았던 게으름뱅이였을 것이다.
 
설거지! 하기 싫은 일거리지만 빈둥거림을 둘러 댈 좋은 핑계가 되어주기도 한다. 오히려 어떤 때는 게으름에서 당당하게 만들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하루 종일 할 일 없이 보낸 날, 한 일이 뭔지 물어 보면 대답할 한 가지를 만들어 주는 것이 설거지이다. 설거지는 하면 할수록 묘한 즐거움도 있다.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조용히 내 안에 갇혀진 단어들을 풀어낼 때 책상에 앉아서 쓸 때 보다 물소리를 들으면서 설거지할 때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결혼을 하면서부터 나의 글쓰기 시간이란 정말 독하게 이기적으로 마음먹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다. 책상에 엉덩이가 붙이기 무섭게 아이들은 날 불러댄다.
엄마, 배고파요!, 엄마 책 어디 있어요?, 엄마 그것 어디 있어요?’
엄마라는 이름은 앉거나, 누워 있으면 안 되는 존재인가 보다. 그래서인지 나는 언제부턴가 책상을 포기하고 설거지를 즐긴다. 조용히 글을 쓰고 싶을 때면 물소리에 문장을 생각해내는 재미도 붙였다. 이것을 특기라고 해도 될까. 본격적으로 설거지를 본업이라고 정한 후부터 설거지를 하면서 일기보다 더 일기다운 글도 생각하게 되었다. 이유는 설거지를 하는 동안은 그 누구도 말을 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물소리에 남편의 텔레비전 소리도 묻히고, 개구쟁이 아이들의 또닥거리는 말소리도 묻힌다. 물소리에 가만히 내뱉고 싶은 말들을 남편과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게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늘 설거지하면서 소리 없이 외치고 있다.
날 좀 가만히 놔두라고!’
나는 말수가 없다. 그냥 조용히 있고 싶다. 이런 성격이 사교성을 요구하는 자리에서는 불편할 때가 많다. 그래서 설거지를 더욱더 즐긴다. 설거지는 수다 떠는 일을 즐기지 못해 서먹한 분위기를 피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명절 때 바쁜 시댁에서도, 편한 친정에서도 손님으로 가는 집에서도 늘 설거지를 맡아서 한다. 조용히 생각하고 싶어서다.
요즘 쌀쌀해진 날씨 탓에 사흘 몸살로 누워있는 동안 남편이 설거지를 했었다. 남편이 쨍그렁 소리를 내면서 설거지를 했었는데 아마도 누워있는 나에게 차마 하지 못한 불만의 표시일 것이다. , 풀리지 않는 돈 문제로 속앓이를 하고 있다는 표시일 것이다. 유독 손에 물 묻히기 싫어하는 남편이라서 설거지는 더욱 더 싫어한다. 그런 남편도 이제 설거지를 하면서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는가 보다.
날 좀 가만히 두라고!’
어쩌면 누구에게도 하고 싶지 않은 가슴 속 찌꺼기들을 설거지 소리에 씻어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점점 설거지를 즐기길 내심 바라고 있다. 나 또한 처음에는 지긋지긋하게 거부했으니까.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변해서 좋다. 그리고 변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서 사랑이 있는가 보다. 웬수같던 남편도 설거지하는 뒷모습이 안쓰러워 보인다. 그 안쓰러움에 내 모습을 담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설거지 동업자가 된 동지애일까!
 
조금씩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바람이 나무를 거세게 흔들고 있다. 바람도 설거지를 하고 있는가보다. 여기까지 달려오는 동안 씻어내야 할 많은 찌꺼기들을 설거지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람이 하루 종일 힘차게 설거지 한 것을 보니 남은 겨울은 순풍이 불 것도 같다.
 
나는 오늘도 설거지 한다. 그 물소리를 따라 오늘 하루를 듣는다. 며칠 앓아누운 탓에 손이 가야할 설거지가 많다. 이렇게 설거지를 했으니 좀 마음도 후련해져야 되는데 아직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는 것을 보니 내 설거지통이 작은가 보다.
 
그래도 좋다. 바람은 또 불 것이고, 설거지는 또 하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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