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의 ‘알림’ 배너에 붉은색이 들어왔다. 단조로운 내 일상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되어 빛난다.
“우리 <서로 이웃> 해요. 꽃그늘 아래에서는 생판 남이 아니라면서요?”
소나기를 피해 처마 밑으로 뛰어든 고양이 같은 어투로 그가 말을 걸어왔다.
‘꽃그늘 아래선 생판 남인 사람 아무도 없네 ’라는 뜻의 고바야시 잇사 (小林一茶)의 하이쿠(俳句)를 빌미로 내 방명록에 글을 남긴 것이다. 벚꽃이 그려진 우키요에(浮世繪)와 함께 블로그의 타이틀로 걸어둔 ‘하나노 카게 아카노 타닌와 나카리 게리 花の陰あかの他人はなかりけり’라는 구절을 본 것 같다. 그도 하이쿠와 우키요에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허물어지려 한다.
블로거들끼리 이어주는 소통의 수단으로 ‘이웃’과 보다 더 친밀한 관계인 ‘서로 이웃’이 있다. 생면부지의 나에게 꺼리김없이 ‘서로 이웃’하자는 그의 도발이 왠지 청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서로 이웃’ 관계를 허락하기 전에 그의 블로그를 검증해 볼 필요는 있다. 리처드 버튼 판 《아라비안나이트》에 대한 나의 북 리뷰 밑에, <아라비안나이트>라는 나이트클럽의 광고 글로 도배하는 유흥업소 웨이터와 행여나 이웃이 되는 불상사는 없어야겠기에.
“제 블로그는 일기 형식으로 쓴 글들이라 비공개로 ‘서로 이웃’에게만 열어둡니다. 물론 ‘서로 이웃’을 신청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구요.” 라는 그의 말은 다소 작위적인 느낌이 든다.
‘난생처음’이라거나 ‘세계 최초’라는 등의 스타팅 블록의 총성처럼 요란한 어휘를 사용하는 사람을 나는 경계한다. 암튼 내가 그의 일기를 열어보는 첫 이웃이라니 인디아나 존스의 탐험 길에서나 볼 수 있는 처녀림에 들어선 듯하다.
블로그의 사진에는 행주질로 반지레한 나뭇결의 식탁 위에 껍질 콩, 아스파라거스, 래디시 등이 담긴 샐러드 볼과 올리브 오일 스파게티가 놓여 있다. 신선한 야채를 고를 때의 느낌과 손수 조리해서 늦은 저녁을 먹으며 어떤 일들을 추억해내는 글에는 유쾌한 습도와 온기가 스며있다. 아내 혹은 어머니가 만들어주는 음식으로 일상을 보내지 않는 독신 남자라는 걸 사진들은 은유하고 있다. 그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라며 부엌 한쪽에 꾸려 놓은 이삿짐의 행선지가 ‘도쿄’라고 한다. 동성애자 친구의 할리 데이비슨을 찍은 사진 속에는 샌프란시스코의 이정표가 들어있다. 그도 성적 소수자인지는 모르겠으나 캘리포니아 어디쯤에서 살다가 도쿄로 근무지를 옮긴 것 같다. 자신이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던 서울과 가까운 도쿄에서 생의 한 시절을 소요하기로 마음먹고 자원한 듯하다.
별도의 사진 폴더에는 도쿄의 어느 스시(壽司) 집의 노렌(暖簾)과 비에 젖어 물빛에 반짝이는 맨홀 뚜껑 위로 벚꽃 잎들이 흩날리고 있다. 어머니의 나라에 와서 그 어머니의 모국어로 된 와카(和歌)와 하이쿠(俳句) 등의 단가(短歌)들을 정갈하게 정리해 놓았다. 꽃그늘 아래 생판 남인 것보다 더 서러운, ‘엄마 잃은 아이’로 살아온 그의 시간이 글의 행간에 흐르고 있다. 속살의 아픔을 내보이며 보채는 아이에게 연민을 품는 내가 당혹스러워 얼른 다른 페이지들을 뒤적인다.
어느새 도쿄에 이삿짐이 도착한 식탁에는 일본풍의 도자기 그릇과 목제 젓가락이 놓여있고 자주 드나드는 식당도 와쇼쿠(和食) 일색이다. 언어와 문화에 대한 글들을 읽으면서, 문화 인류학을 전공했고 영어 ,스페인어, 아버지의 나라말 한국어와 어머니의 모국어인 일본어까지 4개 국어를 구사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세계관이 국지적이지 않고 광활하다는 걸 의미한다. 여기까지 블로그의 사진과 글을 읽으면서 얻어낸 단서만으로도 그와 ‘서로 이웃’이 되기엔 과분하기에 흔쾌히 ‘수락’의 버튼을 클릭했다 .
새로운 포스팅을 하거나 방명록에 글을 남기면 내 블로그의 ‘알림’ 배너가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붉게 물들었다. 생면부지의 그와 나 사이에 일어나는 화학적 반응이다.
그리스 국기가 펄럭이는 뱃전에서 일렁이는 물보라를 사진으로 전송해주었고, 여장을 풀어 놓은 지중해 작은 섬의 민박집 풍경도 전해왔다. 나는 지구본 위의 한 점이 되어 어디든 그를 따라다녔다. 다시 도쿄로 돌아온 날에는 그동안 비워둔 집을 어떻게 청소했고 무슨 음식을 만들어 먹었는지 세세하게 들려주었다. 마치 자신의 부재에 힘들었을 나에 대한 배려처럼 느껴진다.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이 낯선 이와 교감하는 이 위태로움이 예기치 못한 기쁨을 증폭시킨다. 비밀처럼 간직하고픈 순간들이다. 황홀하게도.
즐겨듣는 라디오 방송의 애청자처럼, 자기의 메시지를 수신만 하고 무응답인 나를 잘 참아내고 있는 그에게 점점 미안한 마음이 든다. 용기를 내어 그의 방명록에 답신했다.
“사진들이 예사롭지 않네요. 올려놓으신 이미지들과 글의 행간에서 어떤 분이신지 단초를 찾아 헤매는 것도 즐거워요. 비밀의 정원 열어주셔서 감사해요.”
“ 하! 하! 하! 단초라니요. 궁금한 게 뭔지 약간 떨리지만 다 말해 드릴께요”
글자에도 그 사람의 음성이 베어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다. 적어도 셔츠 앞 단추 여밈이 복어처럼 팽팽하게 벌어진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묻어나는 답신은 결코 아니다.
“외국어를 처음 배울 때 하는 말들 있잖아요. ‘아나타노 나마에와 난데스까’ ‘아이 엠 어 스튜던트’ , ‘하우 올드 아 유?’같은... 뭐 그런 뻔한 문장들을 제외하고 다 궁금해요.” 했더니 오히려 일본어로 자기의 영어 이름과 나이, 국적, 직업 등을 재치 있게 답한다.
“ 거 봐요. 다 말해줄 수 있는 것들이잖아요. ” 라며 희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고 싱그럽게 웃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예상대로 그는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나이다. 벤자민 버튼의 거꾸로 가는 시간과 단박에 피부가 매끈해지는 스테로이드제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나이 차이다. 끝까지 심야 라디오 애청자 모드를 유지할 걸 그랬나 후회했지만 덜컥 내 나이와 가족 신상에 대해 실토해버렸다. 동시에 빗장이 굳게 채워진 그 비밀의 정원의 문밖에서 나는 쓸쓸히 돌아서야만 했다. 다시 내 블로그의 알림 표지는 예전처럼 텅 빈 실험실의 비커 마냥 하릴없이 박혀있다. ‘서로 이웃’이 ‘생판 남’보다 못한 꽃그늘의 봄날은 그렇게 흘러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