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것과의 악수
우리 동네에도 봄이 왔다. 서슬 퍼렇던 동장군을 이기고 보란 듯이 서있다.
반가워야 할 내방객, 이봄은 그런데 낯이 설다. 창을 열면 한 아름 달려오는 풀냄새나 언덕 위에 웃음 짓는 개나리의 고갯짓이, 예년처럼 맛깔스럽지도 자유스럽지도 않다. 사바세계에 내려와 어리둥절해 하는 수도승만 같아서, 가슴을 열고 그 생명의 열기를 느끼려 해도 감흥이 일지 않는다. 꽃씨들에게 태교의 노래 한번 불러 주지 못한 탓일까.
허심탄회하게 봄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건 나만의 경우인지 모른다. 혹독한 칼바람이 물러가는 시늉이었지만, 계절의 상냥함을 영접하기는커녕 체벌 하듯 두터운 외투에 나를 묶어놓았기 때문이다. 문화센터도 한몫을 했다. 빈 요일이 나지 않게 채운 낯선 강좌들로,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감각기관들이 길을 잃었다. 길섶마다 돋아난 새순들에 입김을 불어 넣을 사치는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
집안에서만 맴돌던 나를 낯선 슈퍼우먼으로 만든 건 가족들이었다 말한다면, 옹색한 변명일지 모른다. 그들이 나의 일탈에 방아쇠를 당겼던 것은 사실이다. 식구들 언저리를 잡고 살아온 걸 무슨 큰 과업이나 이룬 듯 뿌듯해 하던 어느 날이었다. “ 이제 그만 놓으면 안 되나?” 남편은 작년에 생일 선물로 내가 준 기타를 “덩그렁!” 당겼다. 함께 세월 읊어가는 연민에도 이력이 났는지, 요즘 들어 부쩍 ‘ 남이야! ‘ 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엄마! 좀 뭐라도 엄마 일거리를 찾으세요!” 저를 낳았던 내 나이를 훌쩍 넘은 딸아이는, 뭐가 바쁜 지 주말에 예약제로 통화하잔다. 소식이 뜸하던 아들도 제 짝의 얼굴을 대동한 모습으로야 화상통화에 나타났다. 그들이 귀띔 해주는 ‘엄마 일 찾기’나 ‘엄마와의 거리 두기’는, 내 평생 룸메이트가 그렇게 쉽게 뱉어 버린 ‘남’이란 단어와 함께 나의 등을 철썩! 때렸다. 갑자기 내 일을 찾으라니? 대관절 어디에 있는 낯선 물건인가 싶었다. 그들이 내 우선 순위 일번이 되고 내가 그들과 하나 된 이래, 따로히 내 일이란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바야흐로 빈 둥지 인생이 시작된 걸까. 그래도 나는 놓으라는 것들을 더 붙들고 늘어졌다. 사랑 혹은 애착이라 이름 붙여진 그건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친근한 울타리였으며, 손을 놓으면 천길 아래로 떨어질 마지막 잎사귀였다.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심사일까. 어느 날 나는 끄덕도 않으려는 내 모습이 낯설어 흠칫했다. ‘그래 좋아, 반쯤은 놓을 수 있어.’ 호기와 함께 내 부재 시에 아쉬워 할 그들 셋을 생각하면서 신바람마저 나려했다. ‘찾아도 전화해도 꽁꽁 숨자.’ 이런 우스꽝스런 유혹은 달콤하기까지 했다. 바깥세상을 향해, 남들이 이때 쯤 시작한다는 배움터를 향해 드디어 낯선 투자를 벌리기 시작한 것이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어찌 되듯, 여기저기 애꿎은 몸뚱이를 만능기계처럼 끌고 다니는 동안 무슨 봄 같은 기분이나 났을까? 어김없이 찾아온 건, 두고 온 절반의 본분마저 감당 할 수 없을 것 같은 낯선 두려움과, 넘실대는 피로감이었다.
아마도 난파되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때맞추어 조우한 ‘수필 반’ 이라는 새 항로가 대수롭지 않은 기지들을 돌려 세우는데 일조를 했다. 글쓰기를 통해 간결하게 일상을 간추려 보고 싶다는 오래 된 열망도 고개를 들었다. 가뿐 해진 핸드백에서는 볼펜 부딪치는 소리가 찰랑거렸고, 나는 비로소 이전에 아껴 두었던 또 하나의 길을 내딛고 있었다.
설익었던 봄이 만개 할 무렵, 드디어 형식과 내용을 갖추었다 자부 할 첫 글을 써냈다. 놀랍게도, 퇴고할 때의 한줄 한 줄은 초고를 썼을 때보다 훨씬 낯설어 보이지 않는가. 혼자서 닳고 닳도록 읽었던 내 글은 신선함이 사라지고 없어, 마치 외계인의 넋두리를 대하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개성이 다른 독자들로부터 낯설지만은 않은 합평을 듣게 될 일이었다. 특별한 그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마침내 내 일을 찾은 듯 느긋하고 두둑한 심정이 되어갔다.
내 글이 읽혀질 그 날이 왔다. 집을 나서 내려가는 길목에서, 나를 보고 웃고 있는 철쭉 한 뭉치가 뭉클하다. 어디선가 낯설지 않은 봄노래가 들려오는 것 같다. 나는 잠시 멈추어, 사랑하는 가족들의 난데없는 말투와, 성의 없이 마주 했던 낯선 것들에게 화답하는 마음으로 악수를 청한다. 나에게 설렘과 쑥스러움을 함께 던져주던 ‘수필’ 에게도 손을 내밀어 본다. 봄은 이제 낯익은 모습으로 나를 감싸는 것 같다. 해묵은 코트의 깃을 세우며 흥얼거려 본다. ‘그래, 낯설어도 괜찮아!’
<<시에>>, 2015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