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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사장 사람들 1    
글쓴이 : 유시경    15-07-20 00:05    조회 : 10,765

공사장 사람들 1

 고교를 졸업한 다음 해인 1985년도 구월 초순, 나는 일종의, 어떤 야성(野性)의 현장에 ‘긴급 파견’된 적이 있다. 비행장과 바다가 인접한 군산외항 산업단지, 한창 준공 마무리 작업 중이던 모 그룹의 공사장 사무실에서 급사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어른들의 뒤를 따라 들어간 공사판은 그야말로 백척간두요, 망망대해였다. 그곳의 일꾼들이란 하나같이 그악하고 뚝뚝한 표정으로 군화나 등산화를 신고서 보폭을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남자들이었다. 일꾼들이 나무토막과 합판조각으로 뚝딱(신기하게도 그들은 망치와 못, 그리고 나무판자 몇 개만 있으면 집 한 채를 완성하는 것이다) 지어놓은 임시 사무실 한가운데서 나는 몇몇 하청업체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전화기 한 대를 담당하게 되었다. 여자라곤, 더구나 여급이라곤 눈을 씻고 찾으려야 찾아볼 수가 없는 노동의 현장에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여자애가 홍일점으로 들어앉게 된 것이다.

 실상 내가 그곳에서 할 만한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철제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서 오는 전화나 받고, 그 내용을(내용이라 해봤자 기껏 “바꿔 달라”는 얘기뿐이었지만) 현장 소장들과 작업반장에게 전해주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끼니때가 되면 근로자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 일, 또 어쩌면 툭툭 던지는 일꾼들의 입담에 장단맞춰주는(만일 내가 제대로 노련하고 조숙한 아가씨였더라면) ‘놀이’ 따위도 능숙하게 이겨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사회 초년생인 나로서는 그들의 언어와 행동양식에 쉬 적응할 길이 없었다.

 누가 내게 월급을 주는지도 처음엔 알지 못했다. 말하자면 책상 위에 근엄하게 놓인 전화기가 나의 유일한 상사였다고나 할까. 아마도 서너 군데의 현장 소장들이 십시일반 돈을 걷어 이 어린 양에게 하사하였나 보다. 최종적으로 봉투를 주는 사람은 전화기가 놓인 사무실의 소장이었다. 사실 내게 커피 한 잔 타달라고 요구하거나 명령하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연장을 가지러 오거나 저들끼리 도면을 보며 상의하거나 본사에 연락을 취할 필요가 있을 경우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거의 사무실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더욱 바쁘게 일했고 생각보다 험악하지도 않았으며, 어느 회사에도 적(籍)을 두고 있지 않은 내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한번은 하청업체인 H기업의 본사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현장 소장을 당장 찾아오라는 호출이 떨어졌다. 멋모르고 잔뜩 겁먹은 나는, 몇 백 미터나 되는 공장을 쉬지 않고 뛰어가서는 “소장니임-” 하고 얼마나 큰소리로 불렀는지 모른다. 천장이 어마어마하게 높아 마치 거대한 지하왕국에 들어온 것만 같았는데, 그곳에는 화이버(Fiber)를 쓴 사람들이 하나같이 굵거나 가늘게 연결된 쇠관에 붙어 일을 하고 있었다. 얽히고설킨 파이프의 미로 속에서 어떤 게 기계이고 어떤 게 부품이며 어떤 게 사람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둡고 둥근 쇳덩어리 한쪽에서 까맣게 검댕이가 묻은 현장 소장의 얼굴이 잠시 내비쳤다가 다시 사라지곤 하였다. “거시기, 전화가… 왔는디요.” 나는 겨우 그렇게 작은 소리로 고했을 뿐이다.

 “하이고, 좀 이따가 전화하라고 그러지. 여기까지 뛰어와? 순진하기는.” 다들 한마디씩 던지는 바람에 나는 그만 울컥하였다. 모르긴 해도 그분은 아마 나의 충성심에 감동을 받았으리라. 혹시 알겠는가? 월급을 올려줄지도. 어쨌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그 가여운 여급은 굽 낮은 구둣발로 질퍽거리는 흙물을 밟으며 들판 한가운데를 다시 속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렸던 것이다.

 현장 어느 곳은 발등까지 진흙이 묻어났고, 어느 곳은 깊어서 무릎까지 쑥 빠져 헤어나지 못하였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은 군화를 착용하나 싶었지만. 어쨌든 그곳은 온통 허허벌판이었다. 살아있는 것이라곤 군인의 총대와도 같은 개개의 연장을 쳐서 내는 쇳소리뿐. 수천 평인지 수만 평인지 모를 그 공장부지 밖으로 나가는 통로는 단 하나, 기업체의 현판이 달린 묵직한 철문뿐이었다. 총성 없는 전쟁터. 연장을 든 남자들의 한결같은 표정과 기계음. “위잉” 소리, “탁탁” 소리, “또르르 철컥” 하는 소리들. 밖에 나가기가 두려운 나로선 되도록이면 사무실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지내는 게 어쩜 신상에 편했는지도 모른다.

 쇳날에 먹고 먹히는 공사판의 하루하루는 사내들의 욕설과 음담만큼이나 아픈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야마’를 내니, ‘앵꼬’가 났느니, ‘마끼’를 감아야 하느니, ‘빠루’가 어디 있느냐 하는 말들은 죄 거기서 들은 일제식(日帝式) 공사판 용어였다. 슬프게도, 백 년이 흘러도 바뀌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국적불명의 언어인 것이다. 그들은 소장이건 십장이건 공구장이건 곁꾼이건, 아니 공장장이나 이사장조차도 온통 거한 방언을 제 살붙이처럼 입에 달고 살아가는 듯했다.

 내구성 좋은, 동그랗고 단단하며 우스꽝스럽게 생긴 모자를 애인처럼 끼고 다니는 남자들을 보면서, 나는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을 하기도 했다. 현장 주변은 온통 드넓은 논두렁과 갯바람과 질척한 땅과 덤프트럭과 지게차 같은 운송수단뿐, 음악도 여흥도 휴식도, 더구나 나어린 여급이 갈만한 화장실 같은 건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어느 한낮엔 소변이 너무 다급해진 나머지 사무실 문을 잠그고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볼 일을 본 적이 있다. 아무래도 그 먼 변소까지 가는 동안에 똥강아지가 영역표시라도 하는 것처럼 가는 길마다 오줌을 흘릴 것만 같았다. 만일 누가 옆에서 우스갯소리를 한마디만 한다면 금세라도 지려버릴 태세였다.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예의와 범절을 배웠으나 원초적인 생리현상 앞에 도덕이나 교양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빨리 일을 처리해야 했다. 문을 잠그고 봇물 터뜨리듯 순식간에 볼 일을 보고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당황한 나는 황급히 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 물을 바닥에 쏟아 붓고는 시침 떼고 서있었다.


 그 무료함. 사무실에 들어앉은 지 두어 달이 지나도 할 일이 생기지 않았다. 사람들의 표정은 딱딱한 쇳덩어리와 동그랗게 말린 도면마냥 경직되다가 풀어지곤 하였다.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뭐가 있을까. 난 너무 따분하였다. 사무실의 작업반장은 내게 집에서 카세트를 가지고 와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어도 된다고 귀띔해주었다. 바람이 들이닥치는 널빤지 벽과 그냥 흙일뿐인 바닥은 청소할 거리도 되지 않았고, 전화기가 주인인지 사람이 주인인지 홀로 앉은 책상은 누구의 비위도 맞출 필요가 없다는 걸 암시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대하는 그들의 말씨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져갔다.

 나는 땀과 흙에 범벅이 된 남자들이 그 질퍽한 군홧발로 간이막사 같은 나무집에 들어와서 콧물을 훔치며 빵과 우유로 참을 때우는 것을 수차례 보았다. 공사장 남자들은 밥 때가 되면 현장 식당으로 열을 맞추듯 들어가 앉았다. 듬성듬성 못이 삐져나온 기다란 목제의자, 금방이라도 철거할 양으로 임시로 비닐 막을 만들어 바람을 가린 ‘한바(Hanba)집’에서 그들은 거추장스럽게 점심을 먹고 있었다. 나무기둥 뒤에 숨어 인부들이 일어나는 것을 구경하면서, 나지라기인 나도 빵이나 과자로 끼니를 때우곤 하였다.

 밥이 없으면 빵을 먹고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는 것이 생각만큼 쉽고 당연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현장 안팎으론 그 어떤 종류의 장터도 존재하지 않아서 우린 모두 안에서 식음(食飮)을 해결해야만 했다. 남자 일색인 험하고 짓궂은 삶의 현장에서, 동질의 여자들을 마주할 수 있었던 곳은 오로지 식당이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실제로 공사판 밥집에서 일하는 또 다른 세계의 여인들을 보고 반가워 눈물이 날 뻔하였다.

 어느 날 C산업 작업반장이 나를 부르더니 “미스 유, 저기 옆에 건물 보이지? 저기 간부식당에 들어가서 점심 먹어, 이쪽에는 ‘도둑놈’들 우글거리니까.” 하고 말하였다. 난 정말 공사장 잡역부들 중에 도둑놈이 많은 줄로만 알았었다. 아니 대부분이 도둑놈이라 생각하였다. 물론 그가 말한 도둑놈이란 의미가 험한 세상의 남자들을 지칭하는 우스갯소리란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 허허로운 현장 식당 뒤쪽에 세련된 간부식당이 지어져 있는 줄을 알아채지 못했다. 다음날엔 염치불구하고 공장장이나 본사 직원들, 혹은 외부 인사들이 방문했을 때나 이용하는 간부식당으로 아예 들어가 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두어 번 정도였을 뿐, 정갈한 밥과 반찬이 매끄러운 접시에 담겨 나왔으나 이내 자리가 불편해서 잘 가지 않게 되었다. ‘본사 두목들’과 현장 사람들 모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공사장의 하늘은 간혹 뜨거운 햇빛을 내뿜다가도 아침저녁으로 쓸쓸한 바람을 선사했다. 먼 들판에서 전장의 기병들이 말을 후려치는 듯한 바람소리가 머리칼을 관통하는가 싶더니, 희뿌연 연기를 내뿜는 현장의 굴뚝처럼 조폭 같은 바람이 쓸려오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삭풍에 등을 돌리고 서면 이내 진눈깨비 떨어지는 겨울이었다. 이제 한두 달간의 내부설비가 마무리되면 나는 이름 없는 환절기처럼 자연스럽게 공사현장을 떠나면 되었다.

 항구도시에 폭설이 내리고 나무집들이 철거되면서, 전설 속에 나오는 광야의 늑대처럼 그들은 사라져갔다. 공장은 완공되었고 현장 사무실은 하나둘씩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도급업체의 사장들은 인부들을 모두 거두어가고 임시로 지은 나무집들은 못이 숭숭 박힌 흉측한 폐기물이 되어 던져졌다. 전화기도 뜯겨 나갔다. 첫새벽처럼 해가 바뀌면서 나의 전화기는 옆 사무실에서 가져가버렸고, 신년(新年)의 눈발 속에서 나도 그 과묵한 기계를 따라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공사판의 대못 한 개만큼의 쓸모도 되지 못하는 여급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현장 소장이 내게 서울 본사의 사환 일을 알아봐주겠노라 하였지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만 어릴 뿐이었던 나는, 하루하루 공사장 사람들이 벙거짓골 속의 고기부스러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눈발 흩날리는 1986년 이월 초순께가 되어서야 모래와 쇳바람 속을 빠져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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