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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이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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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리감자    
글쓴이 : 이춘우    15-10-30 23:04    조회 : 4,534

바리 감자

이춘우

  이런저런 이유로 상삼골 들밭에 가보지 못했었는데 갑자기 그때 생각이 일어 안달이 났다. 지난 가을 베란다를 열어본 아내가 호들갑이다. 감자가 다 상해 먹을 수 없단다. 하지(夏至)에 수확해 저장해 두고서는 겨울까지 요런조런 주전부리(감자전, 감자옹심이, 감자뭉생이, 감자범벅, 감자 크로켓, 감자 샐러드, 감자 칩 등)를 만들어 먹으면 입이 궁금할 걱정 없이 지내리라 생각했었는데 사달이 난 게다.

  감자는 북()에서 전래됐다. 비탈. 고랭지. 강원도. 개마고원. 히말라야 다음으로 높은 안데스. 잉카족. 역순으로 전파된 감자는 이미 토착화한 고구마인 감저(甘藷)에 대비해 북감저(北甘藷)로 불렸다. 말방울처럼 생겨 '마령서(馬鈴薯)'이라고도 했다. 감자는 당 성분이 낮고, Fe, Mg, 비타민 C, B1, B2를 함유한다. 소금기를 배출해 고혈압과 당뇨병에 효과적이다. 천식, 충치에도 좋다. 그리고 다이어트와 피부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 옛날 춘궁(春窮)은 아리고 징글맞았다. 강원도 비탈 돌밭엔 웃음기를 찾을 수 없었다. 자식은 등허리서 칭얼대고 손발은 부르트고 굳은살이 박였다. 소들조차 가삐 할딱였다. 가슴 저 아래서 치밀던 부아는 해가 서쪽 비탈에 산 그림자를 깔 즈음 되서야 걷혔다. 흥얼댈 겨를도 없고 버거운 일에 파김치가 되었다. 고래 심줄보다 질긴 보릿고개. 겪어보지 못한 자의 일상과는 사뭇 달랐다. 이런 춘궁을 이겨내고 굶주린 배를 채우는데 있어 감자는 당시 사람들에겐 수훈의 갑이었다.

  아카시알 따라 올라온 벌통이 여기저기 자릴 잡고,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산마을을 수런거리던 뻐꾸기 울음도 잠잠해질 때면, 감자 농사로 지친 동네 어귀에 가로등 불이 들어온다. 하루농사를 파장하는 동네 수다는 술상머리에서 맴돈다. 쪼그리고 김을 매며 일상을 견뎌낸 아낙들은 막걸리 사발로 저릿한 애기를 묻어낸다. 양간지풍(襄杆之風)의 시발인 상삼골 바람은 아카시아 향기가 산골을 돌아 몰려갈 때쯤에야 가라앉는다. 별빛 받은 감자 꽃이 가쁜 숨을 밭뙈기에 조물조물 말아낸다.

  얕게 끝 갈라진 하양과 분홍 꽃이 매달린다. 나직하게 땅에서부터 올라와 층층이 이파리 달고 달빛서 하느작댄다. 땅덩이 밑서 생명의 잉태 소릴 풀어낸다. 속살을 헤집으며 두 손을 모은다. 상사(相思)의 발원보단 원초적 생명의 지탱이다. 살아내려고 땅속 숨소리가 더 거칠어진다. 비대한 태반을 만들려고 스멀스멀 보다는 바득바득 긴다. 그늘을 드리운 벚나무엔 버찌가 용케도 매달려 대롱댄다. 지쳐 앉았던 나비는 살포시 고갤 디밀다 이내 도리질이다. 살갑게 흔들대는 바람으로 감자는 그렇게 영근다.

  감자 줄기는 튼실하고 빳빳하게 버틴다. 시련과 좌절을 모르는 체 암팡지게 대거리한다. 수굿한 깜냥은 원래 감감이다. 뻔뻔함을 질타라도 하려는 듯 뚝뚝 줄기를 끊어본다. 똑똑 꽃 대궁을 분지른다. 여린 자책 따위는 생각할 짬이 아니다. 땅바닥에는 하양과 분홍 꽃이 가득 늘여 있다. 살아내기 위해 무지하게 뜯어내고 처절하게 불임을 시켜야 한다.

  저녁 안개 걷힌 6월 하늘서 별빛이 낭랑하다. 하루를 불어 끌 때면 야생은 깨어난다. 갈대숲 어딘가 예민한 후각에 날씬한 몸매를 가진 고라니가 바스락댄다.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멧돼지와의 한바탕 씨름은 전쟁이며 본질이다. 소쩍새가 한해 농사를 노래하고, 먼데서 우는 부엉이는 생존을 부른다. 숨었다 나타난다. 두리번거리다 내뺀다. 다시 돌아온다. 농부의 의욕이 야생을 불러들였지만 농부의 살뜰한 방어는 거세로 실해진 감자의 덩이줄기를 달빛 시든 저편으로 내몰린 야생의 눈망울부터 해방시킨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나타나 그놈들 입에서 우적거리며 환생할 농부의 하루는 고되기 그지없다. 영악한 인간의 욕심이 야만을 탄생시켰지만 야만은 생존이요 본능이다.

  감자밭에서 감자를 수확하는 날 명아주와 바랭이를 같이 캤다. 바랭이가 얕게 걸터앉은 뿌리엔 개미집이 유독 많다. 개미의 본능이 나와 반목했다. 개미한테 물렸다. 공생을 거부한 대가다. 물파스를 가져다 개미한테 물린 자리에 발라본다. 쓰리고 따가웠다. 실재는 본질에 앞서고 생존은 의욕의 윗길이다. 한여름이나 불어옴직한 바닷바람이 훅하고 골을 따라 밀려온다. 아쉬운 해거름이 느지막하니 둑을 더듬는다. 어디론가 가는 이른 여름날 긴 해가 널브러진 감자에서 바리에 담긴 감자로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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