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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자가 눈뜰 때    
글쓴이 : 박병률    16-01-24 10:51    조회 : 8,066

                             감자가 눈뜰 때

                                

   감자가 썩어서 화단에 버렸다. 화단에 심은 블루베리, 무화과나무는 단풍이 들고 영산홍, 철쭉은 푸른 편이다. 오랜 가뭄 끝에 어젯밤에 비가 내렸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화단으로 갔다. 나무들이 비를 맞으면 다음 날 생기가 돌아 나무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한층 푸르다. 나뭇잎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아래로 숙이는 순간 내 눈길이 갑자기 멈췄다. 썩은 줄로만 알았던 감자에서 푸른색 빛이 돌았다. 빛을 따라갔다. 감자 윗부분은 시간이 멈춘 듯 말라가고 흙이 닿은 아랫부분이 푸릇푸릇하다. 푸름을 사이에 두고 하얀 싹이 돋았다.

  만약, 감자가 돌이나 나무 넝쿨 위에 떨어졌다면 과연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하며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뿌리를 뻗었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었다. 요즘처럼 가뭄이 지속된다면 식물의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산산 조각날지 모를 일이다.

 

   감자와 나는 전생에서 무슨 인연이 닿았을까…….

  나는 기껏해야 화단의 나무를 바라보고 가끔 물을 준 일밖에는 한 일이 없다. 그러나 감자는 알몸으로 지내면서 흙에 스미는 물기를 빨아들이며 야금야금 뿌리를 내린 모양이다. 낮에는 햇볕에 노출되어 몸이 닳아 오르기도 하고, 어둠이 깔리면 별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외로움을 달랬을까?

  새싹을 바라보다가 비로소 추위를 느꼈다. 사람도 겨울이 가까워질수록 두꺼운 옷을 걸치기에 감자를 꽃삽으로 떠서 땅속에 묻어둘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국화, 제랴늄, 사랑초, 메리골드 등 꽃이 핀 채로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렀다. 감자는 같은 조건에서 어떤 놈은 이미 정신을 놓은 것처럼 흐물흐물하고, 몇 개는 줄기가 어른 한 뼘 정도 자랐다. 줄기에 '열매가 달렸을까?' 하고 아이처럼 호기심이 발동했다. 감자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고개를 돌려가며 살폈다. 그랬더니 아기 주먹만 한, 본래 몸뚱이를 붙들고 그 옆으로 잔뿌리가 수없이 뻗쳐있었다.

  오랫동안 바라보며'씨감자' 를 떠올렸다.

  어릴 적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가방을 팽개치고 먹을 것을 찾았다.

  "어머니, 뭐 먹을  것 없어요?"

  "어디 보자."그러시며 어머니는 광으로 들어가셨다. 조금 뒤 양손에 싹이 난 감자를 서너 개 들고 나오셨다.

  "이거, 씨감자로 아껴 둔 거란다. 땅에 심으면 몇 배로 불어나지."

  때마침 소죽을 끓이던 아궁이 속에 어머니가 부지깽이로 감자를 밀어 넣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른 솔잎 타는 소리가 타닥거릴 때 부지깽이를 들고 불씨를 아궁이 입구 쪽으로 끌어냈다. 감자가 딸려 나와 뒤적거리기 좋게 거리가 가까워졌다.

  '씨감자' 는 조상들이 농사를 지으며 터득한, 한 해 농사를 짓기 위한 일종의 종자였다. 파종할 때 감자 싹이 나는 부분을 중심에 두고, 몸뚱이를 여러 조각을 내서 아궁이에서 나온 재에 버무릴 때 어머니한테 물었다.‘넘어져서 무릎에 상처가 나면, 덧나지 않게 빨간약을 바르는 것처럼 감자도 소독하는 거란다하시며생명은 소중이 다뤄야 한다'라고 한 말씀 덧붙였다. 그 다음 밭고랑을 만들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가며 땅속에 묻어두었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화단에 감자 3개를 묻고 '뿌리만 살면 다 산다' 고 중얼거리며 흙을 다독거렸다. 입동이 지나고 서리가 내리자 줄기는 사라졌지만, 화단에 심은 나무뿌리가 얼지 않도록 낙엽을 긁어모아 수북이 덮어주었다.

  겨울이 가고 새봄이 왔다. 봄이 오자 나는 습관처럼 꽃밭에 물을 주었다. 철쭉, 영산홍, 앵두꽃이 흐드러지게 핀 걸 보며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니 이럴 수가!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라는 성경에 나오는 구절처럼 작년 가을, 화단에 묻어둔 감자 하나가 세상 밖으로 새싹을 힘껏 밀어 올렸다. 나머지 2개는 겨울잠에 푹 빠진 모양이다.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서 줄기가 되고 줄기는 척척 번져서 꽃이 피었다. 감자 꽃이 질 무렵, 밑이 얼마나 들었을까? 하며 기대를 품고 삽질을 했다. 뿌리에 매달린 감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심봤다고 소리를 지르며 줄기를 잡고 땅 위로 끌어올렸다. 뿌리에 매달린 감자 2개가 달랑달랑 춤을 추는 듯 보였다. 마치 '강아지가 뜀박질할 때 불알처럼 흔들렸다' 고 약간 과장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흔들림은 잠시였으나 수확의 기쁨은 뼛속을 파고들었다. 감자가 죽었다는 것은 헛소문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감자는 몸의 상처를 안고 땅속에 뿌리를 내렸다. 그 후, 어둠 속에서 오랜 시간 상처를 다스리며 아픔을 참고 견딘 모양이다. 둥그런 몸을 만들 때까지, 감자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삶의 완성이다.

 

                                                                        경희사이버문학 2015 제1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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