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참 좋아졌다
백두현 / bduhyeon@hanmail.net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우리 집 누렁이가 앞서 뛰었고 그 누렁이를 사랑하는 식구들이 뒤따라 뛰었다. 가족소풍을 나와 달리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공원에 나가 체력단련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가련하게도 누렁이는 쥐를 잡으려고 놓아둔 살충제를 먹고 고통스러워 뛰는 것이었고 그 뒤를 가족 모두가 뒤따라 달린 것이다.
문제가 된 것은 국가 정책의 일환으로 전국적으로 쥐를 잡으라며 나누어준 쥐약이었다. 가뜩이나 부족했던 식량을 얄미운 쥐가 훔쳐 먹기 일쑤라 그랬던 것인데 엉뚱하게도 우리 집 누렁이가 덥석 먹어버리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고통스러운 누렁이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온 동네를 들쑤셨다. 우리 집 여덟 식구도 산토끼를 몰 듯 포위망을 좁혀가며 필사적으로 뒤따라 달렸다. 마치 전쟁처럼 달리고 또 달렸는데 아버지가 이 작은 전쟁의 선봉에 서서 달리며 다급하게 외치셨다.
“놓치문 워디서 죽을지 몰러! 잡으면 위험하니께 뒤따라 다니문며 워디서 죽는지 확인만 햐!”
그런데 몰랐다.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누렁이를 쫒아야 하는지를. 안 그래도 고통스러운 녀석을 더 고통스럽게 뒤따르며 공포감을 조성했는지를. 그저 나는 누렁이를 얼른 데려다 치료해주려고 그런다고 생각했다. 동생들 역시 그렇게 추측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알았다. 아버지도 알고, 어머니도 알고 형까지 알았다. 목적은 단 한 가지였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너무 늦게 발견하면 독이 온몸에 퍼져 누렁이를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누렁이가 쓰러지면 재빨리 배를 가르고 쥐약으로 상한 장기를 분리해야 했다. 그래야 아직 독이 번지지 않은 고기를 일용할 양식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쥐약을 먹지 않았다면 새끼를 낳을 적마다 시장에 팔려져 살림에 보태겠지만 기왕에 죽게 된 바에야 오랫동안 고기에 목말랐던 식구들이라도 맘껏 고깃국을 먹고 영양실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했다.
그만큼 가난했다. 그렇게라도 먹지 않으면 고기구경을 못했다. 시골 마을이라 집집마다 돼지 한 마리와 개 한 마리 정도 키웠는데 먹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다. 엄청난 재산목록이었다. 키워서 내다 팔아야 하는 생업이었고 농사 다음으로 중요한 일종의 사업이었다. 그런데 그런 누렁이가 죽게 된 것이다. 부풀려 말하자면 사업이 망한 것인데 불운을 탓할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로서는 어떻게든 먹을 고기라도 건져서 망한 사업을 추슬러야 하는 업주와 다름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아찔하다. 어느 부모가 독이 퍼지기 시작한 고기를 자식에게 먹이고 싶을까. 어느 사업가가 소비자에게 팔 수 없게 된 불량식품을 식솔들에게 먹이려고 집으로 가져갈까. 또 어느 자식이 부모가 권한다고 독을 품은 고기를 입으로 받을까. 어느 소비자가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를 고기랍시고 기꺼이 먹을까.
도저히 지금으로서는 상상 불가능한 풍경이다. 섬뜩한 살인의 추억 같은 일이다. 그러나 당시는 생존방법이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본능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무엇을 먹을까, 먹거리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혹시 있을지 모르는 뒤탈은 그때 가서나 생각해 볼 일이다. 양심이나 체면 따위란 개나 물어갈 지독한 사치다. 오죽하면 먹고 죽은 귀신은 색깔도 좋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던 시절이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2010년! 전국적인 구제역의 창궐로 돼지를 키우는 축산 농가에 난리가 났다. 축산관련 공무원들에게도 비상이 걸렸다. 구제역이라는 병은 다리에 두 굽을 가진 동물에게 급속하게 번지는 전염병인데 유독 돼지농가의 피해가 컸다. 때문에 건강한 돼지를 지키기 위해 수백만 마리의 돼지를 도살한 후 도처에 구덩이를 파고 묻고 또 묻었다.
그런데 그런 구제역 바이러스가 돼지 자체는 죽이지만 인간은 그 고기를 먹어도 안전하다는 것이다. 먹어도 상관없는 돼지들이 국가정책에 의해 무자비하게 죽어나갔다. 병에 걸린 돼지만 죽이면 그나마 다행인데 어떤 농장에 단 한 마리만 감염되어도 반경 수십km 안에 사육되는 수 만 마리의 돼지들을 무더기로 같이 죽였다. 축산 농가에서는 한숨이 끊이지 않았고 공무원들은 철야근무에 찌들어 갔다. 돼지의 전국적인 개체 수 감소로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돼지고기 가격을 전 국민이 감수해야 했다.
그렇게까지 불필요하게 돼지를 과다 도살시킨 국가정책은 구제역 청정국가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든 그 지위를 유지해야 FTA수교국이라 하더라도 구제역 상시 발생국가인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나라에서 돼지 수입을 막을 수 있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정책이지만 국내 축산농가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아까운 돼지들을 죽이고 또 죽인 것인데 학살에 가까운 것이라 마음이 아프다.
생각해보면 그만큼 이제는 풍요로운 세상이라 가능한 정책이다. 그 옛날 우리 집 누렁이를 죽였던 쥐약정책보다는 백배, 천배 사치스런 정책이다. 그날의 슬픈 기억을 들춰내지 않더라도 지금 이 순간 북녘 땅에서 배고픔에 못 이겨 몰래 압록강을 건너는 동포를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분에 넘치는 정책이다. 그들의 땅에서도 구제역이 걸린 지역의 반경 수십km이내 돼지를 먹지 않고 몽땅 땅에 묻을까. 바다 건너 소말리아의 헐벗은 사람들을 생각해도 참으로 미련한 정책이다. 그들의 땅 어디에 그토록 럭셔리한 정책이 존재한다는 것인가.
그렇더라도 정책의 잘잘못을 따지자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이미 죽은 우리 집 누렁이나 수백만 마리 돼지를 살려내라는 얘기는 더 더욱 아니다. 개를 잡자고 쥐약을 나누어 준 것도 아니고 산 돼지를 몰살시키자고 펼친 구제역 정책도 아니라서 그렇다. 그저 잘해보자는 정책이었는데 운이 따르지 않은 부작용이다. 다만 먹거리를 통해 나타난 뜻하지 않은 부작용조차 세월에 따라 슬프기도 하고 나라에 따라 미련해 보이기도 한다는 사실로 마음 한 구석이 심란할 따름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 좋아졌다. 이 좋은 세상에 살아남은 나는 더 이상 죽어가는 누렁이를 뒤따라 죽도록 뛰지 않아도 늘 배가 불러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