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유년의 실종
미워 죽는 줄 알았다니까, 글쎄. 살짝 맛이 간 아이가 자꾸 무얼 숨기더라고. 나는 성난 얼굴로 숨긴 것을 가져오라고 다그쳤지. 그러면 그 아이는 마지못해 한 번에 한 가지씩만 찾아내오는 거야. 그것이 그렇게 재미있었나봐. 그래서 어떡했냐고? 그냥 구슬리는 수밖에. 그런데 찾아오는 시간이 점점 오래 걸리더라고. 전처럼 그 놀이를 좋아하지도 않는 듯도 하고. 그건 이해할 수 있어. 아이도 생각해봐야 하잖아. 숨긴 물건이 줄어들수록 숨긴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이 나지 않나봐. 그것이 아니라면 그런 체 했을 수도 있지. 그냥 불안했는지도 몰라. 어느새 성큼 곁에 다가와 있는 불안 말이야. 그도 아니면 중요한 것일수록 꼭꼭 숨기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그 아이는 결코 마지막 것을 찾아내오지는 않았어. 그 애도 보통내기가 아니거든. 그 아이는 그날을 마지막으로 나타나지도 않았다고. 어떻게 된 일일까? 아이는 편리한 방법을 택했어. 대신 스스로 실종되기로 한 것이지. 어두운 기억의 언덕너머로 사라져 간 것이야. 그런데 가만, “실종된 아이가 누구라고?”
쥐 눈의 여자
그 거리에 들어서면 너는 이윽고 이별을 고하고 나는 너를 그리워한다. 너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골목 안 작은 음식점의 도깨비불처럼 빛나는 아크릴 간판 아래 하수구 속으로 몸을 숨긴다. 비로소 나는 너를 그리며 너의 부재를 설워하는 것이다. 나 역시 어둠 저편의 더 짙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리라. 생각해보면 그간 많은 것을 잃었다. 작고 사소하며 구체적인 것들, 그밖에 또 무엇? 원래 나의 것이 아닌 것을 떠나보내고 도대체 무엇을 설워하는 것이람? 나는 더 큰 상실을 기다리다가 나를 잃어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면 나는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들과 함께 일 것이다. 나는 내가 소유했던 것들을 반추하며 일상에서의 부재와 낯선 곳에서의 현존을 추상한다. 그런데 그게 반드시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떠나자 너는 숨어 있던 어둠을 헤집고 고개를 반쯤 내민 채 붉은 눈을 반짝이며 혼잣말한다. 나는 전에도 지금도 줄곧 너와 함께 있다. 도대체, “왜 너는 나를 떠난 것이냐?”
빈 집
한동안 잊고 지내던 잃어버리는 병이 도진 것은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몇 달이 지나서였다. 그 무렵은 무엇을 잃어버리면 하루가 가지 않았다. 잃어버리는 품목은 구체적이고 다양했으며 생활밀착형이었다. 우산은 소홀하기 쉬운 물건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모자, 지갑, 가방, 휴대폰, 신용카드, 돋보기안경…. 어쨌거나 집에 돌아와 보면 그날 휴대하거나 소지하고 나온 것 중 한 가지는 꼭 잃어버리는 나날이 계속됐다. 그런 내가 한심했고 측은하기도 했다가 되풀이 되니 참혹한 느낌도 들었다. 잃어버린 품목 중 압권은 동반한 여자였다. 동창모임에서 한잔 두잔 마시기는 했지만 술이 과한 것도 아니었는데. 건물 2층에 있는 남자화장실에 다녀와 보니 기다리고 있어야 할 사람이 안 보였다. 올라 갈 때는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계단으로 내려오다 다른 방향으로 접어든 것인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날따라 스마트폰도 가져오지 않았다. 사실은 그것도 며칠 전 잃어버렸지만.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오니 여자는 집에 와 있었다. 나는 의심했다. 이 여자가 잃어버렸던 그 여자인가? 후유증은 심각했다. 나는 한동안 집에 유폐되었다. 잘 있거라,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 <<시선>> 2017 여름호, 김창식의 난(難?亂?蘭)수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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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
수필을 쓰면서 항상 ‘이것이 아닌데….’ 하는 답답함과 목마름을 느꼈습니다. 주변에서 접하는 글의 내용과 구성이 비슷비슷한 경우가 많았어요. 목가적인 자연예찬, 일상과 주변의 사소한 일, 오래 전의 아련한 추억담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더라니까요. 저 또한 그런 풍조에 편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이 들던 차 <<시선>>의 연재 제의를 받았답니다.
? ‘김창식의 난(難?亂?蘭)수필’은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산뜻한 글쓰기로 독자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산문으로 풀어낸 시, 시로 압축한 산문’, 그러니까 자유로운 발상과 깊은 내용에 더하여 그럴 수밖에 없는 내적 절실함과 치밀한 논리로 직조된 글쓰기라고나 할까요. 아니면 카프카적인 삶의 부조리와 머뭇거림을 헤세 유의 서정적이고 자기성찰적인 문체로 풀어낸 글쓰기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요.
? 왜 글을 쓰는가 자문합니다. ‘생의 숨은 뜻을 찾아서. 삶의 형적을 더듬기 위해. 방황하려고. 방황하는 한 노력하니까. 모험하려고. 모험하지 않는 것도 모험이니까?’ 글쎄요. ‘그냥, 그저. 대책 없이!’가 차라리 그럴 듯해 보이는군요. 그렇다 해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동료 문인은 물론 독자 여러분과 널리 소통하고 싶군요. 저에게 소통이란 기쁨과 함께 때로 외로움, 결핍을 나누는 일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