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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날의 풍경화    
글쓴이 : 오길순    17-06-22 09:55    조회 : 5,743

                                               어린 날의 풍경화

                                                                                      오길순

진보라 색 꽃송이, 초록 색 잎줄기, 그리고 따뜻한 황토와 대비되는 강렬한 선, 인터넷에서 붓꽃’(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을 클릭하면 마음이 이내 평온해진다. 부드러운 꽃잎의 곡선이 예리함을 다독이고 날카로운 줄기의 선이 둔탁한 신경을 두드리는가. 보라와 초록의 대비가 칼날 같던 무질서도 내 쫓아 줄 걸 생각하면 금방 서늘해진다. 한 나절 햇빛바라기를 하면서 붓꽃을 들여다보면 착한 시집 한 권 읽은 듯 온갖 사념이 눅어질 것 같다.

붓꽃에 매료되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어린 시절이었다. 먼 등하교 길, 산과 들에 지천인 삘기를 뽑거나 아그배 꽃을 찾아 쏘다니던 봄날, 허물어지는 공동묘지 아래에서 만난 작은 풀꽃들은 가슴 떨리는 기쁨을 주었다.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무너져 내린 늙은 묘지들의 두려움 도 풀꽃이 압도해버렸다. 시골집 마당만한 늪지대에 둘러친 여린 풀꽃들의 울타리는 봄마다 꿈속의 그림이 되었다.

무엇보다 먹물을 담뿍 머금은 듯 들어 올린 작은 꽃봉오리에서 금방이라도 글씨가 나올 것 같았다. 잔물결 속에 떠돌며 흔들리던 작은 꽃과 맑은 하늘은 동네처녀들의 수틀에 펼쳐진 돛단배처럼 마음의 잔상으로 떠돌았다.

오래 된 무덤가나 습지대를 좋아하던 그 보라색 풀꽃이 각시붓꽃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우리는 붓꽃이라 부르지만 서양에서는 줄기가 칼을 닮았다 하여 용감한 기사를 상징한다니 동서양 느낌도 다양한가 보다. 헤르만헤세도 정원에 붓꽃을 심어놓고 천국의 열쇠라 했다니 나만이 취한 꽃은 아닌가 싶어진다.

붓꽃은 프랑스의 국화이다. 적진에서 죽은 화랑 관창과 정혼자인 무용의 맺지 못한 꽃의 전설도 있다. 그리스 신화의 여신인 아이리스라는 학명은 무지개라는 뜻이니 기쁜 소식혹은 신비로운 사람등의 꽃말을 타고 기다림과 행운을 전해줄 것 같은 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여리고 곱던 각시붓꽃이 멸종위기란다. 아름다워서 사라진 도도새처럼 꺾고 싶도록, 캐고 싶도록 고와서 욕망의 대상이 되었나 보다. 거친 발길에 부서지고 뽑혀진 풀꽃의 생애가 폭력에도 한 마디 말 못하고 사라진 가녀린 민초들처럼 가엾다. 수만 년 이어 온 번식기회를 잃고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를 맞은 꽃의 운명이 대변자도 없이 죽어간 약자의 생애처럼 애달프다.

젊은 날, 고흐의 붓꽃을 직접 보고 싶은 적이 있었다. 그런 마음 때문이었나. 오래 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본 복사 본이 반가워 몇 점 사들고 왔다. 잊었던 늪지대 각시붓꽃을 만난 양 한 보름 여정도 아랑곳없이 고이 들고 다녔다. 그런데 돌아와 표구해서 걸어놓고 보니 전혀 아니었다. 물감의 질감도 평면적이고 색깔 또한 검도록 칙칙해서 괜한 실망만을 주었다. 소년이 자라 쭈그렁 할머니 된 첫사랑 소녀를 만났던 듯, 잊혀진 20호 복사본의 기억이 실망으로 아릿하다.

어느 해 태백산 꼭대기에서 만난 노란무늬 붓꽃들은 또 다른 기쁨이었다. 그런데 들여다보니 상처투성이였다. 선명하지 않은 색깔과 선처럼 찢어진 꽃잎들은 전쟁 통에 굶주린 아기처럼 야위었다. 냉혹한 고산바람 때문인가. 등산객들의 무심하고도 거친 발길 때문인가. 땅에 붙다시피 엎어진 채 가녀리게 핀 노란무늬 붓꽃이 여름날 기와지붕 위에 피었던 해바라기처럼 애틋했다.

 보라색 붓꽃을 맘껏 가꾸어 본 적이 있다. 멀리 시인의 집 연못에서 받아온 씨앗을 심었더니 마당가는 봄 마다 붓꽃 밭이 되었다. 그런데 지난 해 혹독한 가뭄에 가뭇없이 사라졌다. 습기를 좋아하는 생명의 묵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후회만 남았다.     

그래도 그림으로 맘껏 풀어본 적도 있다. 세밀화였다. 칼날처럼 예리하게 색연필을 깎아 꽃잎의 선을 그리면 머리카락보다도 섬세한 잎맥이 종이 위에 살아났다. 칼 등으로 꼭꼭 눌러 입체감을 살릴 때마다 가슴은 마구 뛰었다. 나비라도 날아올 듯 생생해서 무덤 가 각시붓꽃이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

지금의 마을에 이사하면서 어린 날의 늪지대를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5월쯤 마을 뒷산에  오르면 널찍한

공동묘지가 온통 보라색 붓꽃 밭이다. 작은 마을만한 봉분들 사이마다 만발한 붓꽃들은 먹물을 머금은 듯

봉오리들을 품은 채, 가고 다시 오지 않는 인간사를 담담히 지키고 있다.

  산 아래 끊임없는 개발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오래 된 무덤을 지키고 있는 천국의 열쇠들이 영원히 사라진

도도새의 운명처럼 되지 않기만을 바란다.


<<에세이포레>>2017.여름호 제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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