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고모
정민디
그는 수염 자국이 거의 없는 단정하고 말쑥한 얼굴이다. 한결같이 방금 이발소를 다녀 온 것 같다. 피부가 약간 두꺼워 유들유들한 인상을 주기는 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니 잘 생긴 얼굴인데 자꾸 보면 언뜻 여성스러운 면모도 보인다. 키는 그다지 크지는 않으나 덩치가 좀 있고 꽤나 신경 쓴 것 같은 튀는 옷차림이 이국적이다. 양복 윗도리 안에는 보통남자들은 거의 입지 않는 현란한 무늬의 알록달록한 국적불명의 남방셔츠를 늘 바꿔 입는다. 그는 한동안 여자 친구와, 지금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복장학원을 동업 했다.
기실 그를 ‘그’라고 해야 할지 ‘그녀’라고 해야 할 지 난감하다. 우리 할머니의 딸이자 나의 아버지의 바로 아래 여동생이기 때문이다. 남자고모는 무모했던지 아니면 아주 용감했던지 예의 그 남자복장으로 소위 요새 말하는 ‘커밍아웃’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 그녀는 은밀한 단어로 불러져야 하는 동성애자였다.
요사이 어마어마한 공력을 가진 김수현 작가가 안방극장에 동성애문제를 버젓이 내놓았다. 작가는 최대한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방식으로 동성애의 문제를 진지하게 접근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접근 보다 실질적이고 인간적인 접근 방식으로 극을 끌어 나간다. 시청자들이 감정적 정서적으로 불쾌감을 느낄 수 있고 사회적 이해를 바라는 것은 무리지만 집에서라도 행복하게 하자는 작가의 의도가 눈물겹다. 동성애의 주인공인 두 남자는 직업이 각각 의사와 사진작가로 집안에서나 사회적으로나 평탄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의 사람들이다. 사진작가는 이미 결혼하여 자식까지 두었었으나 이혼을 하고 친구였던 의사에게 돌아왔다. 충격적인 진실을 접한 가족은 놀라고 슬펐지만 이해를 한다. 그런 가족의 대처가 따듯해서 울었다. ‘어떻게 살려고 하니’하는 극중 아버지의 비통한 말이 나의 할머니에 담배피던 모습과 겹쳐졌다.
남자고모는 대학 재학 중 시집을 갔다.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새 신랑과는 원만히 합의가 되었다며 친정으로 돌아 왔다. 결혼을 한 후에 성의 정체성을 알았다고 한다. 남자 고모가 내 기억 속에 시작되는 시점은 초등학교 때부터 다. 어머니를 뵈러 명절에는 친정으로 오곤 했다. 우리 조카들은 삼촌인지 고모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녀의 얘기에 심취해 선망했다. 그녀의 직업인 패션에 관한 얘기는 여자들에게는 들어도 들어도 신비로운 세상의 요지경이었다. 무궁무진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연기와 유머를 곁들어 얘기할 때 우리는 그녀를 연예인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세상은 냉혹했다. 하던 사업도 잘 안되고 동성애도 받아 들이여지지 않은 사회의 눈초리에 시난고난 했던지 피폐해진 그녀는 어머니가 계신 장남집인 우리 집에 더부살이를 시작했다. 그녀가 온 후 값나가는 물건들이 없어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그녀의 손등에는 섬뜩한 바늘 자국이 보였고, 늘 몽롱하게 무엇인가에 취해있었다. 결국 그녀는 자살을 시도했지만 깨어난 곳은 정신병동 이었다. 그 곳에서 재활 치료를 받았다. 나는 그 날 이후 그녀를 집안의 재앙이라 생각했고 영원한 평화가 될 뻔 했던 그녀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버린 것에 실망했었다. 구조대원이 많은 집안에서 한 그녀의 해프닝이 싫었고, 내가 가장 사랑했던 할머니에게 아픔을 주는 것을 용서하기 싫었다.
동성애가 유전적인 문제라면 자식을 만들 수 없는 것이 다행이랄지, 아니면 종족 보전을 못하는 것이 바로 죄일지 가늠이 안 된다. 그래서 그나마 소수로 유지되는지도 모른다.
맹인을 보면 재수 없다고 침을 뱉던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나갔다지만 장애우 차별, 인종차별, 동성애를 보는 시각 등 소수에 대한 편견의 늪은 여전히 깊다.
동성애자인 국민가수 앨튼 존(Elton John)이 남자 애인과 결혼식도 올리고 여왕에게 작위 까지 받은 영국을 관대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허나 요즈음 영국 내각의 한 장관이 동성애자로 발표되어 사표를 냈다하니 아직도 소수는 다수라는 편견의 벽을 넘기가 무척 힘들어 보인다. 동성결혼을 합법화해 세계 최초로 동성 총리부부까지 생겨난 아이슬란드의 결혼 법조문인 ‘성(性)에 상관없이 두 성인의 합의에 따른 결합‘ 이라는 아름다울 만큼 간결한 이 말이 저항 없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날이 오기는 할 것인가.
미국으로 건너 간 후 그녀의 비루한 인생 2막을 듣지를 못했다. 아버지 형제들은 그녀의 나이 72세 까지 그 고통을 나누어 짊어졌다. 적어도 가족들은 그녀를 보듬어 준 것이다. 남자고모라고 불린 딸을 가진 어머니가 있었고, 지금은 나도 자식을 가진 어미여서 그저 가슴이 먹먹하다.
06/11/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