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를 먹으며
백두현
오래 전 열대지방인 아르헨티나로 창업 이민을 갔다 실패하고 돌아온 친구가 있었다. 그곳에서 경쟁력 있는 노동력을 활용해 봉제공장 비슷한 사업을 운영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유는 그곳 더운 지방 사람들은 임금이 싼 반면 참 게으르더라는 것이다. 그 나라 사람들은 우리처럼 돈을 모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딘가 꼭 쓸 목적이 있을 때만 취업을 하는 모양인데 딱 고만큼만 벌고 그만두는 습성을 가져서 그렇다. 이를테면 지역적인 커다란 축제가 예정되면 축제기간동안 먹고 마실 돈만 벌고 축제가 끝나면 다시 일자리를 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길거리에서 대충 자도 얼어 죽지 않을뿐더러 가는 곳마다 지천인 바나나 열매만 먹고 살아도 굶어죽을 일은 없는데 무슨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할까. 우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노숙자처럼 빌어먹기라도 해야 정상인데 그곳에서는 게을러도 먹고 사는데 아무런 걱정이 없다는 말이니 어쩌면 축복 받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인지도 모르는 일이겠다.
그렇게 게으른 자들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주는 그 흔하고 흔한 바나나가 우리나라에서는 참 귀한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친구들과 만나면 이심전심으로 바나나에 관한 유머 한 토막을 서로 주고받았다. 당시 외교관 한 명이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 출장을 간 자리에서 바나나가 먹고 싶어 죽겠는데 자꾸 수박을 권해 곤혹스러웠다는 이야기였다. 우리에겐 흔한 수박이 아프리카에는 무척 귀하고, 반대로 여기서 귀한 바나나가 그곳에선 흔해서 생긴 웃자는 소리였다. 얼마나 바나나가 먹고 싶었으면 그런 근거 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며 위안을 삼았을까.
어쨌거나 그런 바나나를 어렸던 나는 서울 사는 고관대작의 집에서만 즐겨 먹는 과일이라고 믿었다. 당시 시골마을에는 첫 딸을 낳으면 초등학교를 졸업시킨 후 서울의 부잣집에 식모살이를 보내 남동생들의 학비를 충당시키던 지난한 세월이었다. 그렇게 서울로 떠난 누나들은 한 두 해 식모살이를 하다 공장으로도 가고 술집으로도 갔다. 더러는 미군부대 주변에서 술을 팔다 흑인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식모살이를 하던 동네 누나들이 명절에 집에 오면 동네 꼬마들을 모아놓고 자랑을 했다. 나는 꿈에서나 먹던 바나나를 그들은 심심할 때마다 먹는다는 무용담이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꿀컥 침 넘어가는 소리가 옆에서 들릴 정도로 컸다. 그리고 누나대신 형이 존재하는 우리 집 가정환경이 얼마나 불행한지 한숨을 내쉬기 일쑤였다.
그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를 따라 동생과 함께 5일장 구경을 가게 되었다. 그때 과일가게 진열장에 산처럼 쌓인 바나나 꾸러미가 눈에 들어왔는데 도저히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엄마 바나나!”
인내력의 한계에 다다른 나는 어머니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나도 바나나!”
동생도 덩달아 투정 아닌 투쟁을 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어머니는 엄청난 결단을 내린 듯 가던 길을 되돌려 바나나를 딱 한 개 샀다. 그리고 뚝! 반으로 나눠 우리 형제들에게 주셨다. 그런데 동생과 나는 맛있다는 생각보다는 과연 누구 것이 더 크게 잘려졌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서로를 경계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지금은 바나나가 참 흔한 세상이다. 흔하다보니 맛도 별로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바나나가 본래 사람의 식량이 아니라 동물의 사료용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아직도 바나나가 좋다. 추억을 먹는 기분이라 그렇다. 맛없는 바나나가 먹기 싫더라도 간식으로 가끔 먹다보면 오롯이 어머니를 만난다. 그날 어머니의 주머니에는 돈이 참 많았다는 확신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돈을 전부 꺼냈어도 생필품을 사고 나면 바나나 두 개 값을 치르기도 부족했다는 사실이 안쓰럽다.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그 때 왜 나는 작게 잘려진 바나나 조각만 생각하고 세 조각으로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을 못한 것이 부끄럽다. 아니, 좀 더 통 크고 어른스럽게 아예 바나나 세 개를 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더라면 결과야 같았겠지만 지금 이 순간 마음이라도 조금은 더 편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