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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자리도 많은데    
글쓴이 : 윤기정    20-11-17 06:19    조회 : 7,471

빈자리도 많은데

 

윤기정

세 명이 앉을 수 있는 경로석에 할머니 둘이 양 끝에 앉았다. 가운데 자리는 보따리 하나가 사람인 양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앞으로 가서 서니 둘 중 한 할머니가 보따리를 무릎 위로 옮기며 곱지 않은 눈길로 아래위를 훑는다. 어쨌거나 여인의 시선이니 참아주자며 앉았다. 앉은 뒤에도 마뜩잖은 표정을 거두지 않는다. “왜 그러시오?” 물으니빈자리도 많은데라며 일반석 쪽을 턱으로 가리킨다. ‘아주머니가 예뻐서요.’라고 받을까 하다가 늘그막에 성희롱으로 몰릴까 봐 그만두었다. 대신에 정색하고왜 젊은 사람 앉을 자리를 뺏어요?”라며 목소리에 무게를 실어 훈계하듯 일렀다.

어느 문예지에서 재미있는 수필을 보았다. 주인공은 집을 나설 때면 열두 살을 잘라서 집에 둔단다. 이야기는 전철 안으로 이어진다. 경로석을 쳐다보지도 않는단다. 열두 살을 빼면 예순다섯 아래가 되는 모양이다. 작가는 떳떳하게 65세 미만의 일반 승객들 틈에 앉는다. 요즘은 할머니들뿐 아니라 영감들의 나이도 겉모습만으로는 짐작하기가 어렵다. 76세라도 그렇게까지 보이지 않는 사람이 많으니 젊은이들의 눈총을 받지 않을 수도 있겠다. 여기까지는 제 잘난 멋이니 젊은이들 자리 하나 차지해도 용서가 된다. 다음 이야기가 심히 괴이하다. 자리가 다 찼을 때 앉아있는 젊은이 앞으로 부득불 밀고 들어서는 노인들 있지 않은가! 젊은이 중 누구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나 보다. 그 장면에서 작가는 요즘 젊은것들을 질타하며 글을 맺었다. 그 글을 읽은 후부터 전철을 타면 서서 가더라도 더더욱 경로석 쪽으로 간다.

열두 살을 집에 두고 나온 일은 자기만족이다. 자기만족이야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며 누리는 만족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지위가 주어지면 누구라도 그에 걸맞은 역할을 해나갈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 말이 성립하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할 수 있을 사람에게 자리를 주고, 할 수 있을 사람이 그 자리에 갔을 때만 타당한 말이다. 두 가지 전제가 충족되지 않으면 자리 준 사람도, 차지한 사람도 불편할 뿐이고 오래가지도 못한다. 우리 정치판이나 직장, 모임에서도 그런 예는 넘쳐난다. 빈자리가 아무리 많아도 내 자리인지 아닌지는 따져보아야 한다. 따지고 말 것도 없이 누구의 자리인지 분명한 자리도 있다.

사회생활을 은퇴한 사람 중에도 자리나 감투에 목매는 이들이 있다. 헌신하고 봉사하는 자리라면 박수 받을 일이지만 작은 이익이나 권리가 걸린 자리라면 아름답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퇴직 후에 할 만 한 일을 찾은 적이 있다. 살던 집에서 가까운 곳에 무학자들을 위한 학교가 있었다. 집에서 가깝고 적지 않은 강사료까지 나온다고 했다. 자격도 맞춤이고 마음만 먹으면 추천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그만두었다. 정규 학교는 아니지만 교사 자격증을 가진 젊은이들이 보수도 받고 경력도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라는 말을 듣고서였다. 나에게는 봉사 활동 정도의 일이지만 어떤 젊은이에게는 교사로서의 꿈을 키울 수 있는 자리였다.

아무리 빈자리가 있어도 불편한 자리는 사양이다. 서울 나들이에 전철 1호선을 쉽게 갈아타려면 경의·중앙선 6호 차량 2번 문으로 타야 한다. 그러나 경로석 가까운 6호 차량의 1번 문으로 탄다. 출퇴근이나 등하교 시간 아니면 오빈역서 타도 경로석에 늘 빈자리는 있다. 없으면 또 어떠냐. 선 곳도 내 자리인데. 하루하루 분에 맞춰 살 일이다.

오늘은 살 날 중에서 가장 젊은 날이지만, 살아온 날 중에서는 가장 늙은 날이기도 하다.

동인지 <아리수 강가에서> 15 202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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