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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기범도 반해버린 샨사    
글쓴이 : 노정애    12-05-16 18:38    조회 : 5,728
 
  치기범도 반해버린 샨사
 
                                                                                                             노문정(본명:노정애)

  늦은 저녁시간에 동생의 격양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왔다.  아이와 함께 귀가하다가 집 앞에서 오토바이 치기범에게 가방을 날치기 당했단다.  펑펑 우는 아이를 데리고 파출소에 있다가 이제야 왔다며 다리가 후들거려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 시간 후쯤 가방을 찾았다는 속보가 날아들었다.  교회 관리실에서 습득 후 돌려받았는데 얼마 전에 구입한 따끈따끈한 핸드폰과 현금, 그리고 내게 빌려간 책이 없어졌다고 전했다. 
  붉은 표지의 그 책은 결벽에 가까우리만치 단어와 문체를 갈고 다듬기로 유명한 샨사(Shan Sa)의 세 번째 소설인 <<바둑 두는 여자>>다.  프랑스 문단에서 동양의 목소리를 내는 그녀의 소설을 난 좋아한다.  지인들에게 한번씩은 다 빌려주어 누더기가 되어버린 낡고 두툼한 책을 치기범이 왜 가져갔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생활고에 힘들어 이 짓을 하지만 책은 보는 사람이라서? 두툼한 가방 보고 달려들었는데 그 이유가 책 때문이라서 화풀이용으로? 제목 때문에? 추측만 난무 할뿐 정답은 없다. 
  어쩜 그는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백제 개로왕(재위:455~475)이 고구려의 간첩 도림(道琳)의 바둑에 빠져 서울을 빼앗기게 됐다는 이야기처럼 바둑에 미쳐 제목만 보고 욕심냈을 수도 있다.  표지를 넘겼을 때 나와 있는 샨사의 매력적인 얼굴에 반했을 지도 알 수 없다.  처음에는 호기심이 그를 책 속으로 끌어드렸다면 한 장 한 장 넘길 때 샨사의 문체에 반해서 나처럼 다음 장을 보고 싶어 조바심 내며 가슴을 여러 번 쓸어내리지 않았을까? 
  1930년대 중국을 배경으로 막 성에 눈을 떠가는 중국 소녀와 천황을 위해 장렬한 죽음을 꿈꾸는 일본인 장교가 첸횡 광장의 바둑판 앞에서 펼치는 아슬아슬한 이중주의 이야기 속에 빠져 책을 읽는 동안은 남의 가방을 낚아채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바둑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흐름 속에 던져진 소녀가 한 나라의 역사를 읽고, 자아를 발견하며, 사랑을 감지해가는 성장의 거울로 비추어졌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남의 가방을 탐할 만큼 막 살아 보았냐? 사랑이니, 자아니하는 단어조차 잊은 지 오래라며 콧방귀를 뀔지도 모르지만 난 그가 책을 펼치는 순간 샨사에게 반해 버렸으면 좋겠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리라는 기대가 없으며 재미가 없고 마음먹은 대로 꼭 되는 것도 재미가 없으며 그렇게 될 것이라고 반드시 기약할 수 없는 사이에 즐거움이 있다. 그런 기약 못할 미로를 더듬어 가는 것이 인생이며 바둑이다.”라는 소설 속 이야기처럼 한치 앞을 모르며 살고 있는 치기범도 자신의 인생을 미로의 바둑판 위에 올려둔 것은 아닐까?
  일주일 후쯤 신문에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해외에서 어학연수를 받고픈 마음에 오토바이 날치기를 한 어느 청년이야기다.  그는 검은 돈으로 멀리 연수를 갔지만 꿈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울고 있는 모습이 계속 보여 죄책감에 견딜 수 없었다며 10개월 만에 귀국해 자수했다고 한다.  책을 가져간 치기범의 꿈속에도 샨사가 나타나 자수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줬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게 했다.     
   난 지인들에게 책을 빌려주면서 그녀가 천재라는 말을 자주했다.  1972년 베이징에서 태어나 9살 때 시집을 발간해 신동으로 불렸으며 천안문사태가 일어난 해에 파리에 입성, 7년 만에 불어로 소설을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바둑두는 여자>>가 프랑스의 고등학생들이 가장 읽고 싶어 하는 책인 공쿠르 데 리쎄앙 상을 수상하면서 프랑스 독서계에 샨사 열풍을 몰고 왔으니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  모국어도 제대로 못써서 머리를 쥐어짜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지만 외국어를 익혀 소설을 쓰고 베스트셀러까지 된 그녀의 책을 읽으면 ‘소설을 쓰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라는 감탄과 부러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물론 내 개인적인 의견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주말 신문에 지적인 외모를 가진 미인이면서 글까지 잘 쓰는 그녀의 사진이 내 손보다 크게 나왔다.  약간의 스릴러를 감미한 스파이 소설 <<음모자들>>을 내 놓았다.  지난해 프랑스 추리 소설계에서 “사랑이 지나치게 중요한 주제 중 하나지만, 서스펜스를 놓치지 않았다.  속임수도 교활했고, 문체의 순도가 대단했다. 오늘날 국제 사회의 암투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보여준 작품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하니 어떤 책일까 궁금하다. 
  그 치기범도 이 기사를 보았을까?  책도 가져가는 사람이라면 신문은 당연히 보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하게했다.  그녀의 매력에 빠져 당장 서점으로 달려갈지도 모를 일이다.  나 또한 신간을 사고 싶다.  잃어버린 책이 꽂혀 있던 빠끔히 벌어진 책장에 넣어두고 지인들에게 빌려주고픈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다.  얼마나 재미있을까? 기대를 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다잡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에세이 플러스>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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