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이면
김숙
삶은 어쩌면 늘 변함없는 물의 본성을 닮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물이 변한다고 여기는 것처럼 삶이 우리를 속인다고 한다. 푸시킨이 유형지에서 우연히 썼다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만 보아도 그렇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말라, 노여워도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라 믿어라.// (…)”
살아가면서 어찌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에 『임헌영의 유럽문학기행』은 이렇게 서술한다. “푸시킨의 시를 사랑하면서도 우리는 과연 삶에서 속을 때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가히 공자나 노자의 경지이고, 차라리 푸시킨처럼 쓸개즙을 핥은 듯이 새로운 역사를 꿈꾸는 게 정상 이리라. 와신상담은 결코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의 전매특허가 아님을 푸시킨의 후반부 인생이나 문학 작품들은 여실히 보여준다.”라고.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은 이 시를 쓸 당시 크나큰 곤경에 처해 있었다. 열여덟 살에 쓴 혁명을 향한 분노의 시「자유」 때문이었는데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 의해 남러시아로 유형을 당했을 때였다.
세계의 독재자들이여! 두려움에 몸을 떨라!/ 그리고 그대들, 엎드린 노예들이여,/ 용기 내어 그 노래 새겨듣고 떨쳐 일어나라!// 아, 아 눈길을 어디에 두어도/ 어디서나 채찍과 족쇄들,/ 법에 대한 치명적인 모독,/ 굴욕스러운 무력한 눈물들이 보이고,/ 불의의 권력은/ 선입견들의 농밀한 안갯속에/ 즉위하였네, 노예제의 무서운 천재/ 타고난 명예욕의 화신이.// (…) 군주들이여! 그대들에게 화관과 왕관을 준 것은/ 법이지, 자연이 아니다./ 그대들은 민중 위에 서 있지만/ 영원한 법은 그대들 위에 있노라./ (…)// 전제정치의 악인이여!/ 그대를, 그대의 왕관을 나는 혐오한다./ 그대의 파멸, 후손들의 죽음을/ 내 잔혹한 기쁨 가지고 보노라./ 사람들은 그대 이마에서/ 민중의 저주의 낙인을 읽노라./ 그대는 세상의 공포, 자연의 치욕,/ 그대는 신에 대한 지상의 모독./ (…)// 황제들이여, 이제 배우라-/ 형벌과 포상,/ 감옥과 제단. 그 어느 것도/ 그대들의 믿음직한 방책이 되지 못함을./ 미더운 법의 보호 아래/ 먼저 고개 숙이라,/ 민중의 자유와 평안이/ 왕관의 영원한 보초가 되리라.
-박형규 옮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시킨 탄생 210주년 기념』
어렸을 때 별명이 ‘볼품없는 오리 새끼’였던 푸시킨은 600년 전통의 귀족 후예였다. 열두 살에 궁정 부속학교(차르스코예셀로) 1기생으로 입학하여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후일 데카브리스트 반란의 주역이 될 동창, 후배들과 함께 수학하였다. 졸업 후에는 외무부 직원으로 근무하였는데 그때 절대 권력에 저항하고 투쟁을 선포한 시 「자유」가 발각되어 내쫓겼다.
추방은 외무부 10등 관직을 유지한 채 전근형식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보면 반역을 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삭탈관직에 위리안치도 불사했을 텐데. 모교였던 차르스코예셀로 출신들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푸시킨의 명성이 얼마만큼 뛰어났으면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관직이 유지되었을까?
드녜프르 연안 예카쩨리노슬라프에 도착한 푸시킨은 수도에서 로비활동을 벌여 준 친구들 덕분에 깡촌이 아닌 유형지를 전전하였다. 낭만주의를 선도했던 바이런을 이 시기에 열심히 읽었다. 그의 시와 혁명사상을 통한 약소 민족 해방운동, 철학과 행동에 심취했고, 이곳 주둔군 장교들과 혁명을 위한 많은 담론을 나눴다.
유형지에는 절친인 푸쉰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는 군대 제대 후 재판소에 근무하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법률 자문과 민권 운동 중이었다. 이때 푸시킨은 어머니의 영지인 미하일롭스코예로 이동하여 지내고 있었다. 바이런을 넘어 셰익스피어에 매료되었던 시기로 로맨티시즘에서 리얼리즘으로 전환하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이 무렵에 쓴 시였다. 가장 괴롭고 힘들었을 추방지에서 이렇게 달콤한 시를 탄생시킬 수 있었음이 놀랍다.
알렉산드르 1세가 남러시아 따간로그에서 죽자 니콜라이 대공이 후계자가 되었다. 푸쉰은 푸시킨에게 페테르부르크로 오라고 서신을 보냈다. 혁명의 도래를 예감하였던지 푸시킨은 길을 떠났다. 도중에 산토끼가 세 번이나 나타나 앞길을 막았는데 좋지 않은 징조라 여겨 가던 길을 멈췄다. 만약 친구의 권유에 따랐다면 반란의 주모자인 시인 릴레예프 집으로 직행하여 데카브리스트 반란에 참여했을 것이고 이미 추방된 자가 황제의 명령 없이 움직였기에 처형되고 말았을 것이다.
데카브리스트란 1825년 12월 14일 푸시킨의 친구, 동창, 후배들이 주축이 되어 군사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후였다. 프랑스 점령을 참가했던 장교들이 분연히 들고 일어선 세상 유례없는 혁명이었다. 그들은 3천 명의 사병과 장교로 도열해 황제에게 요구사항을 발표했는데 농노를 해방하고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라고 주장했다. 법 앞의 평등과 입헌군주제 또는 공화제 등을 용감하게 외쳤다. 그날은 바로 니콜라이 1세의 선서식 날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치밀하지 못했다. 황제 암살 담당자는 종교적 신념으로 변심하여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에 비해 탄압 군대는 9천 명이었다. 군대의 충성서약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혁명은 반란에 그치고 말았다. 릴레예프를 비롯한 5명이 처형되었고 120여 명의 유형이 잇따랐다. 푸쉰은 20년 강제 노역 형을 받았다. 니콜라이 1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는 황제다”라며 반란을 피로 진압했다.
푸시킨은 황제에게 끈질기게 접견을 요청하여 친구들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데카브리스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했다. 그날 현장에 있었다면 가담했을 거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솔직함에 황제는 ‘푸시킨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시인’이라고 추켜 주었다. 관용으로 포장한 독재자의 노련함이었다.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릴레예프의 아내에게 금일봉도 주었다. 푸시킨에게는 거주와 창작의 자유를 허락하되 차르가 직접 검열하고 감시하였다. ‘교육에 대한 보고서’ 제출을 명령했는데 이것은 ‘반골 시인이 황제에게 봉사한다’라는 어용의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의도였다. 푸시킨이 데카브리스트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 정점에 있는 인물이 분명했고 살아있는 혁명의 화신이라 단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옥죔 속에서도 푸시킨은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실패 원인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캅카스로 유형 당한 동지들을 찾아 허가 없이 훌쩍 떠나 답을 찾아 헤맸다. 결론으로 데카브리스트들은 수동적인 군중을 영웅이 지도해서 역사를 가속화 해야 한다고 했는데, 푸시킨은 “영웅들이여, 먼저 인간이 되어라.”라고 했으며 역사적인 합법칙성을 인식해서 민중과 보폭을 맞출 것을 주장했다.
임헌영은 삶이 그대를 속이면 “차라리 푸시킨처럼 쓸개즙을 핥은 듯이 새로운 역사를 꿈꾸는 게 정상”이라고 한다. 서른여덟 살의 생애 중 절반은 감시와 탄압 속에서 오쟁이 진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쓸개즙을 핥듯 살았던 푸시킨! 혁명을 외친 시 「자유」를 발표한 후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으려 날마다 쓸개즙을 마셨을 것 같다. 그러면서 그가 꿈꾼 역사를 왕성한 창작을 통해 러시아 문학의 정수로 승화시켰다. 시뿐만 아니라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를 집필했고 모두 성공작이었다. 아름다운 문체는 성서처럼 러시아어 학습 교재로 삼을 정도다. 그의 작품들은 문학을 넘어 러시아 국민악파 5인조를 비롯한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등 많은 음악가가 오페라와 발레로 창작하여 더 널리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