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봉혜선
덥다. 덥다! 혹 닫힌 문이 없는지 살피고 문을 조금 더 열어놓는다. 그런데, 돌아서며 생각해보니 덥고 뜨거운 열기가 더 많이 들어올 것 같다. 겨울에 바깥의 냉기가 들어올까 문을 꼭꼭 닫는 것처럼 여름에도 그리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아파트는 자연의 혜택을 보게 한다기보다 문을 잠궈 놓고 비우기에만 알맞은 주거 공간이다. 비가 온다는 소식에 말리는 고추가 있어 후다닥 뛸 일이 있나. 뛰어가 장독 뚜껑을 닫을 일이 있나. 바지랑대 세워 널어둔 빨래를 걷을 일이 있나. 문 하나만 닫으면 적막강산, 고립무원이다. 돈으로 든든한 문 하나만 내다 닫아걸면 사는데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어 보인다. 마트 표 고추장 된장에 건조기에서 나온 마른 빨래를 개기만 하면 된다. 마주해 있는 이웃끼리 문을 마주 연다는 것도 얼마나 어색한지 모른다. 일자식이나 양쪽에 나란히 있는 형식을 벗어나 한 층에 세 채를 배치한 요즘 설계는 엘리베이터를 나서면 다른 집을 보지 않고도 자신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매년 휴일인 크리스마스면 운동모임에도 못 가시고 다른 마실 나갈 데 없다 하시는 시아버지를 뵈러 다녔다. 종교가 없는 시아버지는 만인에게 문을 열어놓는 교회에 가는 것을 싫어하셨으니 신세대인 우리가 교회에 안 간다는 것도 확인시켜 드릴 겸이었다. 남들처럼 선물을 기대하는 아이들에게 서양 종교보다 효도라는 동양 고유의 미덕을 가르치기도 하려고 연례행사를 삼았다.
위아래 세대에게 제대로 사람 노릇한 뿌듯한 마음으로 밤 10시쯤 돌아온 동네가 왠지 수런거린다. 질서가 없다 느낀 건 가까이에서 종일 문을 열어둔 교회 탓이거니 하면서 차에서 내린 나를 붙잡은 사람은 다른 라인의 이웃이다. 같은 운동을 해도 전화번호도 나누지 않은 사이인데 구르듯 앞에 선다. “어디 갔다 왜 이제 왔어? 동네 다 탈 뻔 했어. 소방차가 열두 대도 더 왔었어” ‘아뿔싸. 곰국에 가스 불을 한껏 올려 끓여놓고 나간다 하고 끄는 걸 깜박했다!’ 창문으로 연기가 솟고 냄새가 나고 신고하고 경비가 올라오고 문을 두드리고.... 사다리차가 와서 11층 우리 집 뒷 베란다 연기 나오는 창문으로 들어갔단다. 20년도 더 된 얘기이다.
학교에 오래 근무한 친정아버지는 늘 정직·성실을 입에 달고 실천에 힘썼다. 학교 교장으로 부임했을 때에도 일주일 동안 화장실에서 꽁초를 주웠다고 했다. 온다는 교장은 소식이 없고 낯선 이가 아침이면 담배꽁초를 줍는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교사들과 학생들의 흡연 횟수와 꽁초 버리는 버릇이 나아진 건 자연스런 수순이었으리라. 아버지의 교육은 학교에 국한하지 않았으니 아버지 앞에서는 솔직하게 말하면 잘못이 잘못인 체 남지 않았다.
가까운 이들이 간도 쓸개도 허파도 심장까지 빼줄 사람이라 평가하는 나는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본성에 따르려 애쓰고 있다. 오래 사귀거나 알아온 사람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라 오해가 있다고 해도 이웃을 사랑하라거나 자비를 베풀라는 동서를 망라한 본성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마음의 문을 열고 닫는다는 의미가 아닐까. 감옥의 손바닥만 하다는 창문으로도 독립을 보고 꿈꾸며 호연지기를 키우고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한줄기 햇빛과 달빛으로 내일을 희망했다고 했다. 문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다. 배운 대로 살고 싶어 문을 열어두는 것인데 닫는 방법과 시기와 수단을 여전히 모르고 입는 상처가 어떤 상흔을 남길지 겁이 난다. <천일야화>에 ‘이 성의 문은 들어가거나 나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항상 닫혀져 있기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 새로운 왕은 새로운 자물쇠를 하나 첨가시켰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왕가의 혈통을 받지 않은 이가 왕에 앉아 문을 연 결과는 참담했다. 즉시 패망.
사람에게도 문이 있겠지. 그 문의 역할은 무엇인가. 여는 것이 아닌가. 상대에 따라, 역할에 따라 문을 닫기도 해야 하는가. 나 자체의 솔직함이나 열기와 냉기를 불편해 하거나 서먹해 하거나 어색해 하는 상대에게는 문을 닫는 예의를 보여야 하나? 이미 닫거나 반쯤만 열어놓고 닫는 ‘지혜’를 터득한 사람들에게는 먹히지 않는 마음인가보다. 반만 열거나 반은 닫으라고 중용을 들먹이며 중심을 잡으라고 충고하는 말도 들었다. 나에게는 너무 무거운 말이다.
문을 여닫이 혹은 미닫이라 하고 서랍을 ‘빼닫이’로 불렀던 조상들의 지혜가 새삼스럽다. 마음의 문을 어떻게 닫아야 하는지 모르고 받았던 상처의 흉터를 어루만지고 있다. 이제는 내가 어떤 문이라도 자꾸 닫아야 하나보다. 몸보다 크다고 생각한 마음과 정신의 문이 어쩌면 생각보다 작을지 모른다. 정설로 믿어오던 ‘성공한 사람이 끝까지 남는다.’는 격언이 이제는 바뀌었다. ‘끝까지 남은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다.’ 내게 남은 사람은 더 이상 나를 오해하지 않는다. 여름에 문 닫는 걸 이해해 주는 주변인들 말이다. 한둘이지만 그런 사람만 남아서 다행이다.
오늘 새삼 깨달은 것처럼 계절에 관계없고 상대에 상관없다. 바깥의 열기도 냉기도 차단하는 방법대로 문을 닫는 게 낫겠다는 생각처럼 더 많이 생각해서 ‘상대에 따라서’ 마음의 문을 더 닫거나 더 열어야 할 것 같다. 위아래가 가로막혀 지열과 태양열이 조금 누그러지는 아파트 중간 층 주민답게 사는 거다. 이 방법이 평상심을 가지고 지킬 수 있는 현명한 처세가 아닐지 더 생각해봐야겠다. 내 마음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마음의 문을 여닫아 보아야겠다.
맞바람을 기대하려면 앞뒤로 나란히 뚫리지 못하고 비스듬하게 난 창문들이나마 활짝 열어야 할까. 에어컨 냉기가 채 식지 않아 견딜 만한 온도인 것이 문 닫아놓은 덕이라 여기는데 여름이면 안에서 문을 열어놓아야 덜 더운지 태양을 피해 문 안으로 들어가 꽁꽁 닫아야 하는지 궁금하다. 혹시 불어올 한 줄기 바람을 원하면서 창문을 너무 조금 열어놓은 건 아닐까. 문을 조금만 열어놓아야 할지 바깥 더위가 들어오지 못하게 더 닫아두어야 할지 헷갈리는 건 더운 여름 탓이려나.
2022 <<수필미학>> 가을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