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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계에게 말 걸기    
글쓴이 : 노정애    12-05-16 19:31    조회 : 6,136
 
기계에게 말 걸기
 
                                                                                       노문정(본명: 노정애)

  20년 가까이 쓴 냉장고가 고장 났다. 냉동실에 들어있던 음식물들은 병든 냉장고의 대변인처럼 흐물흐물 힘이 없고 아프다며 울기라도 했는지 바닥은 흥건히 젖었다. 고장 신고를 받고 온 A/S기사는 오래된 냉장고라 20만원의 수리비를 주고 고쳐도 다른 부품들이 도미노처럼 줄줄이 고장날 것이라며 새로 구입할 것을 권했다. 환경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수리비용과 새로 구입할 냉장고 값을 열심히 저울질했다. 망설이고 있는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15년 이상 된 냉장고를 새것으로 바꾸면 전기세가 많이 줄어 5년 이상만 써도 본전은 뽑는다며 달콤한 미끼까지 던졌다.  울며 겨자 먹기로 새 냉장고를 구입했다.
  새 냉장고가 온 날 이제는 생명이 다한 냉장고를 보내며 ‘그동안 우리 집에 와서 고생 많았다’며 문짝을 쓸어주었다. 더 오래 써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 헌 냉장고에게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배달 온 기사들은 새 냉장고보다 헌 냉장고에 더 정신이 팔려있는 나를 이해 못하겠다는 듯 쳐다보았다.
   새 냉장고에 물건들을 정리해 넣으며 ‘우리 집에 온 것을 환영한다. 잘 부탁해’라며 낮게 말을 건넸다. 누군가 이런 나를 본다면 외로움에 지쳐서 기계에게 말을 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수시로 집에 있는 가전제품들에게 수고했다, 잘 부탁해 등의 말을 한다. 멀쩡하게 잘 돌아 갈 때는 모르다가도 고장이 나면 아쉬워지는 것은 내 쪽이니 쓰면서 늘 고마움을 표현하곤 했었다. 전기를 꼽는 순간부터 생명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 함부로 다루지 못하는 내 성격 탓도 있으리라. 가끔은 정말 말을 알아듣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는지 집에 있는 대부분의 제품들은 잔 고장 없이 평균수명보다 오래 쓰는 편이다.
  이런 나에 반해 남편은 자신의 차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푼다. 함께 차를 타면 “오늘 잘 부탁한다.” 또는 “오늘 수고 많았다. 고마워.”라며 심부름 한 아이 칭찬하듯 차를 쓰다듬어 주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 목소리가 애인에게 말 걸 듯 은근해서 ‘그냥 차와 살림을 차리라’며 가끔 놀리곤 했었다. 장거리 출장이 잦은 남편을 무사히 집까지 잘 데려다 주는 것이 고마워 때때로 나 또한 고맙다는 칭찬을 했었다.
  지난 6월 가까운 지인 부부들과 속초로 여행을 하게 되었다. 우리 차를 이용했기에 남편이 핸들을 잡았다. 휴일이라 차가 밀려 평소 4시간 거리를 6시간씩 가다보니 마음이 급했다.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속력을 높였다. 언덕에 올라서니 급커브길이 나왔다. 한순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에어백이 터지고 차가 하늘을 날아 2M 높이의 옹벽 옆 하천으로 뒤집어져 떨어졌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 거꾸로 매달려 숨이 막힐 것 같은 에어백 가스를 맡으며 정신이 들었다. 차를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는 모른다. 주위를 보니 뒷좌석에 탄 부부가 얼굴에 피를 흘리며 부상당한 병사처럼 앉아 있었다. 남편은 가슴을 움켜쥔 체 괜찮은지 계속 묻고 있었다. 차는 하늘을 향해 배를 다 드러내고 눌린 찐빵처럼 납작해져 있었다. 우리들은 119차에 실려 근처 병원으로 갔다.
  다행이 4사람 모두 약간의 타박상과 찰과상만 있었을 뿐 다른 이상은 없었다. 검사를 받고 응급조치를 마친 후 걸어 나오면서 본 세상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때서야 아침부터 제대로 먹지 못한 것을 떠올린 우리들은 배고프다며 근처 식당을 찾아 밥부터 먹었다. 많은 이들이 운이 좋았다며 기적이라고 말했다. 그 뒤 우리들은 서울로 올라와 한의원에서 2주 정도 치료를 받았다. 차는 3주 가까이 수리를 받았다. 차가 가장 심한 부상을 입은 것이다.
 새 차처럼 수리되어온 차를 보며 남편이 ‘고생 시켜서 미안하다’며 가만히 쓸어주었다.    차가 친절하게 대해준 주인을 위해 자신의 몸만 부수고 우리를 모두 무사하게 해준 것 같아 나 또한 고마움을 듬뿍 담아 어루만져주었다.
 우주 안의 모든 것에는 생명이 있다고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다. 존재하는 것들이 가지고 있는 심연의 깊이를 알지는 못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기계에게, 식물에게, 타인에게, 가족에게로  말을 걸면서 어쩌면 나 자신에게로 말을 거는지도 모른다. “너 잘 하고 있니?”라고. 나 하나가 모여서 세상이 되니 나부터 제대로 잘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으리라.
 남편은 여전히 은근한 목소리로 “잘 부탁해”라며 차에게 말을 건다. 이제는 살림을 차리라는 질투의 말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생명의 은인에 대한 예우이다. 나 또한 전기세가 많이 줄어 본전 뽑을 수 있다는 말이 일회용 미끼만은 아니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다른 가전제품들을 고장 없이 오래쓰길 바라며 나는 진심을 담아 기계에게 말을 걸고 있다. “고마워 예쁜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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